삼국시대도 성씨가 있었다
보스톤코리아  2014-11-03, 15:28:53 
박혁거세와 그 부인 알영, 남해 차차웅, 유리이사금, 파사이사금의 능으로 전해지고 있다
박혁거세와 그 부인 알영, 남해 차차웅, 유리이사금, 파사이사금의 능으로 전해지고 있다
신라 최초의 김씨왕, 미추왕릉(대릉)
신라 최초의 김씨왕, 미추왕릉(대릉)
 2014-06-27

한반도에서 성씨(姓氏)가 제대로 정착하게 된 것은 태조 왕건이 고려를 개국하면서 귀족이나 공훈가문에 성을 하사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AD 940). 하지만 고려 건국 이전 삼국시대 때도 성씨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은 고(高)씨가 성이었고, 그를 도와 부여를 함께 탈출한 세 사람에게 극(克)씨, 중실(仲室)씨, 소실(小室)이라는 성을 사성하였다. 그 外에 부정(負鼎)씨가 있었고 최, 모용. 송, 장, 배씨 등의 씨 성이 있었다.

백제는 왕성(王姓)을 여(餘)씨, 또는 부여(夫餘)씨로 불렸고, 8귀족 가문이 각각 사(沙), 연(燕), 해(解), 백(苩), 진(眞), 목협(木劦), 국(國) 이라는 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 외에도 흑치(黑齒), 저미(姐彌) 등의 성씨가 있었다.

백제 개로왕 때 고구려의 침입으로 수많은 백제 사람들이 일본 열도로 이주했을 때 일본 왕가와 귀족들의 족보인 신찬성씨록을 만들었는데 절반 이상이 백제계 도래인이 기록된 것을 보면 적어도 백제 상류 사회에는 성씨가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신라의 경우는 왕성(王姓) 박, 석, 김(朴, 昔, 金) 세 성씨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고 삼국사기 기록에는 개국초에 6촌장 이, 최, 정, 배, 설, 손씨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진흥왕 순수비에 성을 쓰지 않고 아무 지방의 누구라고 호명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당시에 성이 없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성급한 결정이다.

중국에서도 당나라 이전에는 성씨가 있어도 “강릉의 영철이”식으로 호칭하다가, 당나라 때에 이르러 문벌을 중히 여기기 시작하면서 성씨를 쓰기 시작하였다. 신라 역시 중국의 수, 당 시대에 맞춰 성씨를 사용한 흔적이 많이 있다.

진평왕 때 김씨, 박씨 성을 가진 사신을 중국에 보냈고 경덕왕(742-765) 때 역시 중국에 이씨, 설씨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다. 문화 류(柳)씨의 경우에는 문헌 비고에 집안의 연원이 자세히 소개 되었다.

중국 하(夏) 나라 우량의 13세손 공갑왕의 동생 조명(朝明)이 평양에 와 살았다. 조명의 후손가운데 수긍(受兢)이란 사람이 있어 백성 교화에 힘써 왕(王)씨성을 얻었다. 그의 13대손 왕몽이 신라에 살 때 초가집에서 왕이 나온다는 참언이 돌아 왕(王)자성을 가진 왕몽이 아들들과 함께 지리산에 숨어 차(車)씨로 성을 바꾸었다. 그 후 신라 13대 미추왕 때 왕몽의  후손 차건갑(車建甲)이 승상이 되었는데 그의 아들 차승색과 손자 차공숙이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문화 류씨로 다시 변성하게 되었고, 돌고 도는 참언 그대로 왕몽의 3째 아들의 후손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게 되었다.

문화 류씨 세보를 이곳에서 언급한 것은 삼국시대 이전에도 성씨가 있었다는 것을 알리려는 의도에서 문화 류씨를 소개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상고시대부터 내려오는 성씨도 있다. 마한(馬韓)은 마지막 준왕을 끝으로 망하고 3왕자 우평(右評), 우성(右誠), 우량(右諒) 세 왕자가 남게 되었는데 첫째 우평은 고구려에 망명해 북원(北原)선우씨가 되고, 둘째 우성은 백제에 항복해 덕양 기(奇)씨가 되었다.

막내 우량은 신라에 망명해 상당(上党) 한(韓)씨가 되었는데 상당은 지금의 청주를 말한다. 그래서 청주 한씨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청주 한씨 세보에 따르면 고려 태조가 견훤을 정벌하려고 고려군 10만명이 남행할 때 한란(韓蘭)이 술과 고기, 음식으로 10만 군사를 호궤하여 그 공으로 고려 창업 공신이 되고 한란은 청주 한씨 시조가 되었지만, 청주 한씨 씨성은 그 전에도 오랫동안 있어왔던 것이다.

통일 신라 전에 왕족이 아니면서도 특별한 시조 탄생 설화를 지니고 있는 두 가문이 있었다. 남평 문씨(南平文氏)의 시조 문다성(文多省)은 신라 20대 자비왕(458-479) 때의 인물이다. 그가 갓난아이로 남평현의 장자 못, 연못가에 있는 높은 바위 위에서 발견되었다는 전설속의 인물이었다. 그는 지증왕부터 진지왕대에 걸쳐 벼슬하고 남평백에 봉해졌다. 현재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이 바로 그곳이다.

창녕 조씨(曺氏)의 시조 조계룡(曺繼龍)은 신라 26대 진평왕(579-632)의 사위였다. 그의 어머니 예향(禮香)은 창녕현 고암촌 태생인데 혼기에 이르렀을 때 배가 아파서 창녕 화왕산 용지(龍池)에 가서 목욕재개하고 기도를 올리니 신기하게 병이 완쾌되었는데 바로 태기가 있었다. 그리고는 어느날 밤 꿈에 한 남자가 나타나 “이 아이의 아버지는 용의 아들 옥결이다. 잘 기르면 자라서 재상이 될 것이며 자손 만대에 번영이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들려주었다고 한다. 진평왕이 이 아이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조(曺)씨 성을 사성하였고 후일에 부마를 삼았다고 한다.

지금까지 여러 성씨를 열거한 것은 삼국시대 때 성씨 제도가 있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주지시키고자 함이었다. 그 외에도 많은 성씨가 삼국시대 때 있었지만 지면 관계상 여기서 끝내고 다음 회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성씨 김씨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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