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나라의 엘리스
보스톤코리아  2014-11-24, 12:34:48 
이승철씨가 (아마도 독도에서 노래를 했던 최근 행보가 발단이 되어) 일본 입국을 거부당했다는 뉴스를 확인한 오늘로부터 꼭 60년 전인 1954년 11월 12일… 뉴욕 맨하탄 근처의 엘리스 섬 (Ellis Island)의 이민 사무국 (Federal Immigration Station)이 폐쇄되었다. 

아일랜드 대기근, 뉴욕 콜레라, 그리고 캐슬 가든 이민 사무소 
입국 단계에서부터 이민자에 대한 체계적 ‘관리’가 필요성이 제기된 것은19세기 중반이다. 1845년 아일랜드에서 단시간에 백만명의 생명을 앗아간 감자 대기근(Potatoes Famine)은 아일랜드인들에게 확실한 방출요인 (Push Factor)이 되었다. 1845년 후 약 5년간 미국땅을 밟은 아이리쉬의 수는 50만명이었다. 

물론 감자 대기근 이전에도 아일랜드 출신의 이민자들은 다수 존재했다. 가령 1825년 완공된 이리 운하(Erie Canal) 등 수로 공사를 담당했던 노동자들, 그리고 철도가 운하를 대체해가던 시기 철도 공사에서 일했던 건설 노동자들 중에 아이리쉬계 이민자가 다수 있었는데, 대개는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유입된 숙련공들이었다고 한다. 또한 식민지 시대에 이주했던 스코틀랜드계 아이리쉬들은 개신교를 받아들인 이들이었고, 미국의 건국에도 굵직한 이름을 올린 이들이 있다. 

 그런데 1840년대 이후부터 아이리쉬 이민의 양상이, 그리고 그들에 대한 대접이 달라졌다. 일단 숫적으로 대규모가 되었지만, 이들의 대부분은 숙련된 기술이나 교육, 혹은 이민에 대한 사전 정보라든가, 정착금 따위 없는 채로 미국에 왔고, 최하층민의 삶을 살았다. 
당시 미국에서 아일랜드 출신 이민자들은 노골적이고도 공공연한 천덕꾸러기였다. 일단 “거지꼴”을 하고 미국에 왔다는 점 때문에, 대개는 열렬한 카톨릭이었던 탓에, 그리고 그냥 괜히 싫어서. 매우 규모가 크고 조직적인 반이민정서 (Nativism)은 신규 이민 유입 반대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는 정당이 등장하게 만드는 정치적인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1849년 뉴욕에서 대유행했던 콜레라 역시 가뜩이나 천대받던 아이리쉬 이민자들이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뉴욕은 대부분의 아이리쉬계 이민자들이 처음 정착했던 곳이며, 그들이 밀집해서 거주했던 곳이지만, 공중위생 수준은 아직 열악했던 시기다. 유럽 곳곳을 돌다가 뉴욕에 상륙한 콜레라와 아이리쉬 이민의 대규모 유입은 결코 무관하지는 않았을 게다. 

그리하여 뉴욕 주는 뉴욕에 유입되는 이민자들을 효과적으로 제한하거나 관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배터리 공원 ( Battery Park)에 위치한 요새 캐슬 클린턴Castle Clinton (혹은 캐슬 가든)에 미국 최초의 이민사무국(New York State immigrant processing facility)을 개설하게 된다. 

"고단한 자들이여. 가난한 자들이여, 자유로이 숨쉬고자 하는 군중들이여. 내게로 오라."
19세기 후반부의 미국에서 일어난 변화 중 가장 중요했던 것은 2차산업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업자본가의 탄생, 생산력의 급격한 증가, 노동운동, 세금 혹은 통화 정책과 관련된 정치 논쟁들, 도시의 발달 등이 이시기의 산업혁명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2차 산업 혁명은 <새로운 일자리>라는 형태로, 대규모 이민의 물결을 가져오는 견인 요인으로도 작용했다. 이민자들은 대량생산에 필수적인 “노동력”을 공급할 수 있었으니까. 또 하나 견인요인으로 작용했던 교통의 발달 역시 19세기 후반의 대규모 이민을 부추겼다. 

 그런데 2차 산업혁명을 견인요인으로 미국에 유입된 이민자들의 숫적 다수는 아일랜드계나 독일계가  아니라 그리스, 이탈리아, 헝가리, 슬라브, 폴란드 체첸 등의 남동부 유럽출신 이민자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이주한 (주로 짜르 러시아에서 박해를 받던)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차지했다. 이러한 트렌드에는 19세기 후반 극심한 사회, 경제, 정치적 변화를 겪던 남동유럽의 정세 즉, 방출요인의 공이 크다 하겠다. (비유럽권인 시리아, 터키, 아르메니아 출신 이민도 같은 이유로 급증했다)
여러 날의 항해로 지친 이주자들이 “아 이곳은 미국이구나!”라고 처음 느낄 수 있는 상징일 수도 있는 자유의 여신상에는 이렇게 써있다고 한다. 

"고단한 자들이여. 가난한 자들이여, 자유로이 숨쉬고자 하는 군중들이여. 내게로 오라."
허나 현실에서 자유의 여신은 가난한이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앞에서 언급한 캐슬 클린턴의 이민사무국은 1855년 설립되었는데, 채 반세기가 지나지 않아 새로운 이민자그룹이 급증하면서 “유럽의 쓰레기”를 맨하탄에 그냥 쏟아붇는 것에 대한 뉴욕인들의 반발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이에 미국정부는 1890년 이민업무를 연방정부 소관으로 옮긴 후, 1892년 맨하탄 근방의 아주 작은 섬인 엘리스 아일랜드에 새로운 이민 사무국을 설치했다.

1등칸에 승선한 이들은 간단한 서류 심사 후 바로 내릴 수 있었지만, 3등칸 승선객들은 긴 줄을 기다려 건강검사와 서류검사를 마쳐야했고, 결과에 따라 일정기간 엘리스섬에 격리, 구금되거나 본국으로 되돌아가거나 해야했다. 

엘리스 아일랜드 시기, 대규모 이민에 대한 대규모 반이민 정서는 1921년과 1924년에 각기 발효되었던 이민 제한법 (Immigration Quota Act of 1921 & National Origins Act of 1924)으로 이어졌는데, 이 법안들이 통과된 이후의 엘리스 아일랜드를 거쳐 미국에 입국한 이민자는 120만명 수준이다. 그런데 1892년부터 약 60년간 이민자들의 관문 역할을 했던 엘리스섬을 거쳐 미국에 입국한 총 이민자수는 약 1200만명. 오늘날 약 1억 명의 미국 인구 중  40%  가량은 이 곳 엘리스섬을 거쳐갔던 대개는 환영 받지조차 못했던 이민자들의 후손일 것으로 추산된다고한다.  미국 이민사에 있어 엘리스섬이 차지하는 무게는 결코 작지 않은 듯 싶다.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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