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78
보스톤코리아  2015-04-27, 12:23:42 
우여곡절을 겪으며 새롭게 탄생한 그 당시 우리나라의 무도를 대표하는 단체 ‘대한태수도협회’, 이 태수도라는 ‘기명奇名’의 무도명 또한 기형아 같은 작품이다. 그런지는 몰라도 얼마 후 결국 이 태수도협회는 ‘태권도협회’로 개명을 되었다. 현재도 화랑도의 분파라고 자처하며 극소수의 무도인들이 수련하는 ‘태수도太手道’가 있기는 하다. 물론 당시 대한태수도협회의 태수도의 명칭은 이와는 개념이 다르다. 5.16 군사혁명위원회의 포고령(제6호)에 의하여 사회단체가 통폐합되는 과정에서 탄생한 무도계를 대표하는 ‘태수도跆手道’의 탄생설화(작명과정)를 보자. 

포고령 발표 후 문교부의 주관하에 사회 유사단체 통폐합은 가속화 되었다. 무도계는 당시의 초창기 5 ~ 9대 문파의 관장/대표들이 몇차례의 모임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하다가 그 다음 회의는 1961년 9월19일 송무관의 관장인 노병직이 한국체육관에서 주재하였다. 당시의 서로 다른 의견의 가장 문제점은 단체(대한공수도회, 대한태권도회, 대한수박도회 등)의 통합이 아니라 협회의 명칭이었다. 즉 그 협회를 상징하는 무도의 명칭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였다. 당시 남태희(청도관 출신으로 군에서 최홍희의 부관을 지냈으며 최홍희를 도와 오도관을 만들고 또한 ‘태권도’ 명칭을 작명했다)는 벌써 1955년에 작명되어서 1959년에 각 관의 대표들이 모여서 무도협회를 창설할 때 만장일치로 ‘태권도’로 했으니까 태권도협회가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엄운규(청도관)는 찬성했지만 윤쾌병(지도관)이 반대하면서 ‘공수도’로 할 것을 고수했다. 그리고 윤쾌병의 의견에 노병직(송무관)과 이남석(창무관)이 동조하면서 이견을 좁히질 못했다. 그래서 청도관 측의 찬성을 얻지 못한 윤쾌병은 절충안으로 태권도의 ‘태’자와 공수도의 ‘수’자를 따서 ‘태수도跆手道’로 하자고 제안을 했고, 표결 결과 찬성 4표, 기권 2표로 ‘태수도跆手道’를 당시 우리나라의 무도를 대표하는 명칭으로 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모임에 참석했던 모든 관장들은 7단으로 높였다. 

이 대한태수도협회는 1962년 12월에 대한체육회로 부터 가맹승인을 얻었고 이듬해 2월의 정기총회에서 28번째의 정식 경기종목 가맹단체가 되었다. 이 시점이 바로 태권도가 이른바 호신과 자아수양을 위한 ‘무도武道’에서 타인과의  경쟁을 통하여 우열을 가름하는 ‘경기(Sports)’로 진화/변화되는 중대한 과정이었다. 긍적적인 사고에서의 발전적인 면을 보면 그 후로 ‘스포츠 태권도’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최홍희가 해외로 태권도를 전파하면서 1966년에 ‘국제태권도연맹(International Taekwondo Federation, ITF)’을 결성하였고, 이것이 최초의 태권도 국제단체이다. 그리고 1973년 5월 25일 서울(국기원)에서 제1회 세계 태권도 대회가 개최되었으며, 5월28일에 ‘세계태권도연맹(World Taekwondo Federation, WTF)’이 창설되었다. 김운용이 총재가 되어 WTF를 이끌면서 ‘Sports 태권도’의 세계 점령화는 가속의 탄력을 받았다. 

군정의 포고령으로 졸지에 경기단체가 된 무도는 전국체전은 물론 국내외적으로 스포츠화의 가속화가 더해졌다. 표면적으로는 통합된 무도계는 외형적으로 성장의 발돋음을 하고 있었지만 이면에는 많은 갈등이 도사리고 있었다. 전통 무도의 스포츠화로 무도의 진수와 철학을 터득하기 보다는 경기에서 승리하려고 득점의 요령만을 터득하려 하였다. 또한 협회의 운영을 대한체육회의 지침에 따른 방향 설정과 비무도인들의 참여와 정치적인 입김들은 여러 문파에서 모여서 만든 무도협회(대한태수도협회)를 화합시키기 보다는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였다. 또한 무도라는 동질성을 공유하고 상호 공생의 길을 찾으면서도 각 관은 대립과 우월성을 내세우기도 하였고, 또한 민간도장들과 최홍희의 군 도장 간의 갈등, 공수(가라데)를 배운 일본 유학파들은 무덕관 황기가 만주에서 양국진으로부터 전수받았다는 중국권법의 무력武歷을 증명하기 어렵다며 그의 무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오만 등, 군정 하에서 강제로 재정립되는 무도계는 주도권을 잡기위해 반도의 결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말레이시아에서 대사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최홍희가 대한태수도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명칭을 다시 ‘대한태권도협회’로 바꾸었다. 여기에서 무덕관의 황기 관장은 끝까지 반대하다가 최홍희의 뜻에 동의했지만 그는 자신이 중국에서 배운 권법에 무예도보통지를 연구한 무도를 당수도에서 화수도花手道로 또 수박도로 개명하면서 결국 정치화된 스포츠태권도와 결별하고 참 무도의 전수를 위하여 은둔(미국 이민)하였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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