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91
보스톤코리아  2015-08-03, 12:03:23 
현대 태권도사에서 빼어 놓을 수 없는 인물이 김운용金雲龍이다. 그가 현대 태권도 변천사에 끼친 영향이 막대한지라 따라다니는 수식어도 많다. 이를테면 '태권도 황제', '줄타기의 명수', '박정희에 비유되는 사람' 등 그의 독보적인 카리스마와 입신을 위한 능란한 처세술, 그리고 많은 공적과 과오의 명암이 겹치는 족적은 태권도와 함께 시작되어 IOC(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 국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까지 남기고 있다.

그는 '본의 아니게' 태권도계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우리나라의 태권도를 세계화 시켰고, 그 태권도를 발판으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아성'을 쌓으면서 부귀와 영달을 누릴 수 있었다(국기원 부원장을 지낸 이종우의 증언에 따르면, “내가 김운용 씨에게 협회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하니까 김운용 씨 말이 '세 분한테 승락을 받아야 한다'는 거예요. 내 짐작에 그 세분은 박종규 실장, 김종필 최고위원, 박정희 대통령이었던 같아요.” – 新東亞, 2002년 4월호, 육성철 기자의 인터뷰 인용, 여기서 협회장은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을 말함이며, 당시에는 김용채 <1967년 1월 30일 ~ 1971년 1월 16일 재임>가 회장으로 있었다. 박종규는 대통령 경호실장이었고, 김종필은 민주공화당 총재 수석상임고문으로 국무총리가 되기 직전이었다). 현존하는 인물에 관하여 논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주관적인 평가는 뒤로 미루고 그가 태권도계에 발을 들려 놓으면서 맡은 직책과 관련된 공적公的인 업무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가 쌓은 공적功積과 저지른 과오를 객관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131) 

김운용은 1971년 제7대 대한태권도협회의 회장으로 추대되면서 태권도계에 들어왔다. 그 후 국기원을 건립하여 초대 원장, 세계태권도연맹을 창설하여 총재를 하면서 세계 태권도계를 장악하였고 그의 적극적인 정치외교 수완으로 태권도를 세계화 하였다. 태권도가 세계화 되는데는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태권도를 지도한 사범들의 역할이 가장 컸지만, 김운용이 '자아 수련과 호신용의 무도'로 머물러 있던 태권도를 경기화/스포츠화 시키면서 세계적으로 확산되었고, 이 '태권도의 세계화'가 그의 일생에서 가장 큰 업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업적은 태권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스포츠를 전반에 거쳐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단연 한국의 스포츠를 격상시켰고, 우리의 불모지였던 국제스포츠계에서 '세계태권도연맹' 뿐만 아니라 'GAISF(General Association of International Sports Federation, 국제 경기 연맹 총연합회)' 회장과 IOC위원으로서 보인 그의 리더쉽과 정치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그가 전공한 정치외교학을 마음껏 발휘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김운용은 1971년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으로 추대되기 전 청와대 경호실 보좌관을 거쳐 학술원 원장으로 재임하고 있었다. 그는 1931년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 김학도는 조선민보사 기자였으며, 그는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육상과 스모에 남다른 소질을 발휘했고, 중학교 때는 스케이트, 육상, 복싱, 유도, 가라데 등 여러가지의 종목을 배웠으며 학예회에서 피아노 연주도 할만큼 예능의 소질과 함께 예체능계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뿐만 아니라 학업 성적도 우수하였으며 특히 영어에는 자신이 있었으며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었다. 그는 어학에도 재능을 발휘하여 후일 6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으며, 결국 그는 자신의 탁월한 어학능력을 바탕으로 세계 스포츠계에 입신入身하여 IOC부위원장까지 입신立身하였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외국인들과 대화할 수 있는 자신을 자랑스러워 하였고, 동숭동의 서울대학교에 자주 가서 미군들과도 대화하였으며 늦은 밤에도 그들과 어울리면서 터득한 지식으로 영어시간에는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그의 영어교육의 길잡이가 되어준 은사인 외교관 홍재익의 영향이 가장 컸다. 홍재익은 김운용의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그 역시 홍재익과 같이 외교관이 되기 위한 꿈을 키우면서, 1949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1950년 일어난 한국전쟁은 외교관이 되려는 희망을 안고 교정에 들어선 젊은 김운용의 꿈을 무산시켰다.

131) 참고문헌: '세계를 향한 도전'(김운용, 2002, 연세대학교 출판부), '태권도 – 역사,정신,철학'(안용규, 2000, 21세기사), '스포츠와 권력: 김운용, 그 이후'(안용규, 2008년5월5일, 태권마루), '<태권도 황제> 김운용 날개 꺾인 30년 신화'(육성철, 신동아 2001년12월호), '이종우 국기원 부원장의 <태권도 과거> 충격적 고백!'(육성철, 신동아 2002년4월호) 등 김운용이 몸담았던 기구의 약사略史와 기타 언론매체.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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