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의 세상 스케치 528회
보스톤코리아  2016-01-04, 11:38:21 
첫 눈이 내렸다. 어린 아이처럼 설렌 마음으로 창밖을 얼마 동안 내다보았다. 세월의 흔적으로 나이를 가늠하지만, 마음은 언제나 청춘이지 않던가. 고희를 넘기고 팔순을 맞으신 어른들께 여쭤봐도 같은 말씀을 해주신다. 아직도 '마음은 청춘'이라고 말이다. 눈이 내리니 잠시 어린아이가 되어본다. 요즘 아이들이야  똑똑한 기계와 친구가 되어 흙내 맡아볼 시간이 거의 없다. 어려서 흙도 만져보고 흙내도 맡아보고 들풀과 들꽃도 마주하고 풀 내도 맡아보고 가끔은 눈을 감고 바람 소리도 들어보면 좋으련만. 그렇게 자연과 더불어 뛰어놀아야 몸과 마음과 정신도 튼튼해질 것인데 말이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하얗게 눈 내리던 긴 겨울방학 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지냈더라 생각에 머물러 본다. 그래, 겨울 방학이면 언니와는 다섯 살 터울이 져 놀아주지 않아 언니와 뛰어놀던 추억은 별로 없다. 늘 언니가 내게 양보했던 기억밖에는 말이다. 45여 년 전 시골 작은 마을의 겨울은 왜 그리 추웠는지 모른다. 아무래도 방한복이 부족했던 시절이라 더욱 그랬을 게다. 이렇게 눈이 하얗게 내리는 날에는 동네 또래 친구들과 눈싸움도 하고 썰매도 타고 깔깔거리며 놀다 보면 어느새 뉘엿뉘엿 해가 기울고 굴뚝의 연기 피어오르면 '막내야 밥 먹어라'하고 귀에 익은 엄마의 목소리 귓가에 들려온다.

한국의 겨울방학은 미국의 여름방학 만큼이나 길었다. 두 달 간의 긴 겨울방학 동안 몇가지 숙제가 있었는데 저학년에게는 '그림일기'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했던 나는 그 어느 숙제보다 그림일기 숙제는 거르지 않고 잘했던 기억이다. 오늘 문득 그림일기를 쓰고 그렸던 그 시간이 그리워졌다. 어쩌면 빛바랜 그 어린 시절의 작은 얘기들 속에 오늘의 내가 이미 들어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어린 시절 그림일기를 쓰고 그리다 자라면서 늘 기록하며 메모하는 습관이 생겼고 여러 곳을 여행할 때도 기록하는 습관을 놓치지 않으려 사진으로 담곤하는 것이다.

몇 년 전부터 해마다 '반년의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1년 동안의 기억을 더듬어 정리하기란 그리 쉽지 않아 반년으로 줄여 사진을 정리하며 간단한 메모를 남겨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다. 지금도 정리된 기록을 들여다보며 지난 기억과 추억에 젖어보기도 한다. 때로는 다른 나라를 여행했거나 다른 주에 여행을 다녀왔는데 여행지의 명소와 명칭이 잘 떠오르지 않을 때 다시 기록을 찾아볼 수 있어 참으로 좋다. 나이 들면서 아무래도 기억력도 떨어질 테니 무엇보다도 눈으로 기억할 수 있는 기록으로 '사진'을 추천하고 싶다. 그 사진 아래에 간단한 기록으로 날짜와 장소와 명칭 정도라도 좋다.

요즘은 카스(카카오 스토리)에 일상의 소소한 얘기들을 남기는 분들도 많으니 함께 공유할 수 있어 참으로 좋지 않은가. 물론, 그것을 좋아하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자신의 성향에 맞춰 자신만의 기록으로 남겨도 좋을 일이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해서 지금 하는 다른 사람을 지적하거나 탓할 이유는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다만, 복잡한 것이 싫어 가장 친한 친구 몇으로 정해놓으면 그런대로 재미도 솔솔 있고 부산스럽지 않아 좋다. 현대인이라면 그래도 소소한 일상에서의 '작은 누림' 정도는 찾아 누리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가족들과의 공유는 참으로 재미있다. 우선 우리 시댁 가족들을 예로 들자면 시어른은 한국에 살고 계시고 시아주버님 댁은 워싱턴에 그리고 시누이(누나) 댁은 프랑스이다. 이렇게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형제·자매들과 손자·손녀들을 합치면 모두 15명이다. 그래서 날마다 한국과 미국과 프랑스의 네트워크는 밤낮없이 쉬질 않는다. 그래도 다행이다 싶은 것은 부모 형제가 먼 곳에 있으니 보고 싶다고 쉬이 볼 수 없고 보고 싶은 마음을 글이나 사진으로 함께 나눌 수 있어 감사하다. 서로의 일상을 함께 공유할 수 있어 소통이 이뤄지니 고마운 일이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지금도 흐른다. 잡을 수 없는 시간은 언제나 앞을 다투고 지난 세월은 시간의 꾸러미들 속에 희로애락의 소소한 일상을 챙겨 희비를 낳는다. 그래, 그렇게 발 빠른 시간을 좇으려 애쓰지 말고 내 시간을 살자. 그래, 지난 세월의 흔적들 속 남은 아쉬움과 후회도 내 삶이어서 고맙다고 토닥토닥 보듬어 주자. 그래, 기쁜 환희만이, 즐거운 행복만이 인생이라면 조금은 밋밋해 재미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내게 주어진 삶에 최고는 아니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삶이면 멋지고 아름다운 인생이지 않겠는가. 이렇듯 소소한 일상의 '그림일기(반년의 기록)'를 써보자.


시인 신영은 월간[문학21]로 등단, 한국[전통문화/전통춤]알림이 역할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skybost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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