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대륙 인디언의 역사 : 17. 토지할당을 통한 동화정책 (4)
보스톤코리아  2016-08-29, 13:20:22 
존 콜리어(John Collier) 인디언 국장 (계속)
CCC의 인디언부에서는 인디언에게 트럭운전, 목공, 원예, 기계수리 등 기술교육도 실시하였다.
콜리어의 인디언 사랑은 그의 나이 35세이던 1919년에 시작되었다. 콜리어는 친구인 예술 애호가이자 백만장자인 Mabel Dodge 여사를 만나러 뉴멕시코의 타오스 푸에블로(Taos Pueblo)로 갔다. 타오스 푸에블로는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될 만큼 옛 전통문화가 잘 보전된 역사적인 마을이다. 콜리어는 그곳에서 인디언을 처음으로 만났다. 2년 동안 타오스의 예술인 마을에 머물면서 인디언의 역사와 현재의 상태에 대하여 공부하여 인디언의 고유문화가 백인들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하여 사라져가고 있음을 깨닫고 인디언의 전통을 보전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인디언을 백인 문화에 동화시켜 미국인화하겠다는 계획은 매우 그릇된 정책이며 그 정책의 중심에 있는 도스법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1923년 인디언방어협회(American Indian Defense Association)를 결성하여 인디언의 전통문화를 지키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메리엠 연구팀이 전면적인 인디언의 생활실태를 조사하게 된 것도 콜리어와 동협회의 꾸준한 노력 덕분이었다.

홈스테드법(Homestead Acts) 
인디언과의 토지거래는 발견의 원리의 연장선상에서 연방정부만이 당사자가 될 수 있다. 인디언으로부터 거두어들인 땅의 처분은 전적으로 연방정부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다. 땅의 일부는 공공용지로 남겨 두고 많은 토지를 농민들에게 유무상으로 불하했다. 무상불하 방식을 규정한 홈스테드법 시행 이전에는 1841년에 제정된 토지선매권법(Preemption Act)이 있었다. 정부 소유 토지를 매각할 때에는 이미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이 매우 싼 가격으로 해당 토지를 매입할 수 있는 우선권을 부여하는 제도이었다. 이민자들이 보다 쉽게 토지를 소유하게 함으로써 자영농민(yeoman farmer) 육성을 더욱 가속화시키기 위하여 아예 무상으로 토지를 제공하는 법을 마련한 것이 바로 홈스테드법이다. 남부에서는 노예제도에 기반을 둔 대규모 농장방식의 농업에 불리한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무상공여제도 도입을 반대하여 왔으나 남부의 주들이 연방을 탈퇴하는 바람에 1862년에 쉽게 홈스테드법이 통과되었다. 최초의 홈스테드법 제정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필요에 따라 더욱 조건이 완화된 홈스테드 관련법들이 제정되었다. 

이 법에 의하여 21세 이상으로서 미국정부에 적대행위를 하지 않은 미국시민은 누구나 소정의 절차에 따라 5년간 농사를 지을 경우 160에이커(약 20만평)의 땅을 불하 받을 수 있었다. 농사짓기에는 부적합하여 목장으로 사용할 경우에는 640에이커까지 땅을 얻을 수 있었다. 1976년 연방 토지정책 및 관리법(Federal Land Policy and Management Act)의 통과로 홈스테드법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알라스카는 예외적으로 1986년까지 토지 무상공여가 허용되었다. 1862년에서 1986년까지의 기간 동안 160만 명의 자영농이 불하를 받았으며, 그 총면적은 약 110만 km²에 달했다. 이는 한반도의 약 5배에 해당하는 땅이다.

토지선점경주(Land Run 또는 Land Rush)
인디언의 땅을 연방정부가 인수하여 자영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할 경우 수많은 불하 희망자가 한꺼번에 몰려온다면 누구에게 홈스테드를 공여할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토지선점경주라는 코미디 같은 제도가 도입되었다. 토지선점경주는 오클라호마에서 모두 일곱 차례 실시되었는데 최초의 경주는 1889년 4월 22일에 있었으며, 가장 큰 규모의 경주는 1893년 9월 16일 체로키로부터 양수받은 땅(Cherokee Strip 또는 Cherokee Outlet)에서 벌어졌다. 토지선점경주의 대상이 된 땅의 크기는 모두 약 33천 km²로서 남한 면적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면적이었다. 

첫 경주는 1889년 4월 22일 정오 시간에 5만 명의 참가자가 일제히 출발하여 자신이 원하는 필지로 달려가는 것이었는데, 미리 마음에 둔 땅에 몰래 숨어들어 출발시간에 맞추어 나타나 자신이 먼저 도착했다고 우기는 사례가 많아서 토지관련 다툼이 많이 발생했다고 한다. 경주가 개최된 곳에서는 불과 반나절 만에 인구 만 명의 도시 두 개(Oklahoma City와 Guthrie)가 생겨났다고 한다.

(다음 호에 계속)


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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