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마늘밭에서
보스톤코리아  2016-11-23, 12:06:15 
애당초 시어머님이 내 생일을 기억해 주시리라 기대하진 않았다.  하지만 "내일은 마늘을 뽑으러 가야 한다"는 시어머님의 말에 남편이 냉큼 "그럼 저희도 같이 가죠"라고 대꾸하자 나는 망연해졌다. 옆자리에 앉아 간장 게장을 발라먹던 딸아이가 곁눈질로 힐끔 내 얼굴을 살폈다. 눈치 코치 없는 아들 놈은 한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지 젓가락으로 열무 김치를 깨작거리고 있었다. 딸내미의 반응에 남편은 아차하는 얼굴로 날 바라보았지만 이미 그는 주워담을 수 없는 말을 내뱉은 뒤였다. 우리 가족은 내일, 나의 마흔 두번째 생일날에 땡볕 아래서 마늘을 캐게 될 판이었다. 아버님의 기대와 어머님의 정성을 듬뿍 받고 자란 충청도 육쪽 마늘을.

다음 날, 우리 가족은 귀와 목덜미를 내리덮는 가리개가 달린 챙 넓은 모자, 팔꿈치까지 오는 팔토시, 그리고 고무 장화로 단단히 무장하고 집을 나섰다. 어머님의 셔츠와 통넓은 바지까지 빌려 입은 내 모습은 나무랄 데 없는 영농 후계자로 보였다. 

6월의 볕은 벌써 뜨거워지기 시작해서 허투루 낭비할 짬이 없었다. 아버님은 바다건너 온 실속없는 일꾼들을 재촉해 차에 실었다.

마늘밭은 시댁에서 차를 타고 5분쯤 들어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 남편 말로는 거기가 시댁이 원래 살던 곳이라고 했다. 그 마을에 저수지가 생기면서 시댁은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봤자 애들 걸음으로도 30분도 채 안 걸릴 거리였다. 그런데도 남편은 마치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이라도 한 기억처럼 떠들썩하게 그 때 일을 말했다. 별일이군, 남편의 말을 듣고 나는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이래저래 뒤틀린 심사를 그렇게라도 내보여야 속이 좀 풀릴 듯하였다. 

5년만의 한국 여행이었다. 그동안 딸아이는 이마에 여드름이 송송 맺힌 사춘기 소녀가 되었고, 응석받이 아들은 그럭저럭 소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본인은 한사코 부정하지만 남편의 이마는 그저 ‘넓다’라고 형용사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 무엇으로도 세월을 지울 수 없는 중년의 아줌마가 되었다. 아이들은 자라갔고, 우리는 늙어갔다. 

그렇게 세월은 도무지 공평치가 않았다. 

깊이 패인 주름살마저 밭고랑을 닮아가는 아버님과 ㄱ 자로 꺽인 허리를 곧추세울 때마다 느린 한숨을 내쉬는 어머님에게 무정한 세월의 발걸음은 더욱 가파랐다. 깎이고 깎이는 바위처럼 두분의 육신은 닳아 없어지는 것들의 곤고함과 거룩함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마늘밭까지 가는 동안 나는 두 분의 세월을 헤아리며 내 꼬인 심사를 토닥이려 애썼다. 하필 불의 성정을 가진 여자를 골랐으니 환란의 가시밭길은 당연히 남편의 몫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 물처럼 덤덤한 남자를 택했으니 인내의  불가마를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삶에선 도무지 공짜가 없는 것 같았다.

자동차는 밭과 밭이 이어졌다 끊겼다를 반복하는 좁은 시골 길을 바둥바둥 달리다 문득 멈추었다. 고추밭, 옥수수밭, 들깨밭, 참외밭…. 갖가지 작물들이 자그마한 자리를 오손도손 차지하고 있는 곳 어디쯤에 시댁의 마늘밭이 있다고 했다. 

차가 서자마자 아버님은 마늘 캘 연장들을 챙겨들고, 어머님은 묵직해 보이는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밭고랑으로 들어섰다. 할아버지 할머니 뒤를 따라 아이들은 졸랑졸랑 고추밭 두렁을 걸어갔다. 

고추밭이 끝나는 곳에 네다섯평 남짓해 보이는 자그마한 마늘밭이 있었다. 올해는 마늘값이 아주 좋다며 함박 웃음을 지으시던 시아버님을 보고 마늘 농사로 한밑천 장만하시려나보다 짐작했던 나의 예상이 무안해지는 크기였다. 마늘값이 아무리 좋기로 그 작은 마늘밭에서 나올 마늘양이 얼마나 될지는 뻔했다. 게다가 서울과 대전 형님들, 고모댁에 나눠주고 집에서 쓸 마늘을 남겨놓고 나면 뭐 어디다 내놓고 팔 것도 없어 보였다. 나는 내심 안심이 되면서도 왠지 아쉬운 기분이 들어 애매모호한 눈빛으로 마늘밭을 바라보았다.

시아버님이 가져온 연장을 한쪽에 부려놓는 사이 어머님은 아이들과 남편을 데리고 마늘밭 너머 풀이 무성한 공터로 가셨다. 가만보니 그 무성한 풀 사이로 봉긋 솟은 봉분이 두개 보였다. 시집온 지 십여 년, 하지만 시댁에서 머문 시간은 대략 보름이 될까말까한 나로서는 처음 보는 봉분이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인사는 드려야지. 니들 증조 할아버지 증조 할머니시다"
그렇게 말한 어머님은 들고 있던 검은 봉지에서 쑥개떡이 담긴 보시기 하나와 소주 한 병, 잔 두개를 꺼내었다. 남편은 말없이 잔에다 소주를 따라 쑥개떡 옆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우리 가족은 그 앞에 나란히 섰다. 그리고 바로 조금 전까지 그 존재조차 몰랐던 분들의 산소 앞에서 다같이 머리를 숙였다. 

아이들은 눈치껏 산소에 큰절을 드렸다. 귀찮아하기 보다는 오히려 한국학교에 다니며 어설프게라도 배운 것을 써먹을 수 있어서 반가운 기색이었다. 낯설고 초라한 산소 앞에서 마치 큰 보물이라도 발견한 것 마냥 눈을 반짝이는 딸아이를 보니 마음 한 자락이 아득히 멀리 흘러갔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를 기억하는 호사를 아이는 여태껏 누려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이국땅에서 뿌리도 없이 아슬아슬 살아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간신히 뿌리내린 것들의 절박함을, 아이도 언젠가 알게 될까. 지나간 먼 시간 속 아득한 핏줄의 근원을 향해 잠시 머리 숙이는 이  순간을, 아이는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그리하여 문득 나는 그 자그마한 봉분 앞에서 한없이 간절해졌다. 아이들이 이 순간을 기억하기를. 언젠가 그들에게도 마치 허공에 발을 내딛는 것처럼 망망한 날이 찾아온다면, 이 작은 봉분과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를 떠올리기를. 그렇게 우리는 결코 혼자일 수 없음을 떠올려주기를. 그 기억으로 잠시나마 위로받을 수 있기를….

큰절을 올린 우리는 잠시 봉분을 뒤덮고 있는 잡초를 뽑아내고 마늘밭으로 돌아갔다. 
태어나서 처음 마늘밭에 서 보기는 지들이나 나나 마찬가지인 것도 모르고, 아이들은 내게 마늘을 어떻게 캐느냐고 물었다. 물끄러미 서 있는 내 앞에서 남편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삽으로 어떻게 마늘을 캐는지 보여주었다. 마늘에 상처를 내지 않으려면 마늘대에 너무 가깝지 않게 삽날을 꽂아야 한다고 몇번이나 강조하면서. 

어머님과 아버님은 벌써 고랑 하나를 맡고 앉아 마늘을 캐기 시작하셨다. 아버님의 삽이 날렵하고도 경쾌하게 마늘알을 돋궈올리면, 그 곁에 앉은 어머님은 마늘에 붙은 흙을 탈탈 털은 뒤 마늘알이 한쪽으로 향하도록 나란히 줄맞춰 놓았다. 평생을 함께 일해 오신 두분은 아버지가 쿵, 하면 어머니가 짝, 하는 식으로 경쾌한 리듬을 타고 움직였다.

나는 얼른 딸아이의 손을 끌고 그 옆 고랑으로 갔다. 그리고 짧막하고 다부진 손잡이가 달린 삽을  들어 땅속 깊숙이 찔러넣었다. 그리고 삽날을 비스듬히 누이며 손잡이를 힘껏 눌렀다. 끙,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지만, 너무 깊이 박힌 삽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손잡이에 힘을 주어도 흙 한 줌 옴싹하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시아버지의 잰 손놀림 뒤엔 허다한 노동의 시간 속에서 체득된 빈틈없는 정확함이 들어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오도가도 않는 헛삽질에 힘을 쓰는 동안, 옆 고랑에 앉은 남편은 보란 듯이 마늘알을 끌어올렸다. 아들 녀석은 좋아라 소리를 지르며 마늘대를 쥐고 흔들었다.

나와 딸아이는 번갈아 삽질을 하며 느리게 마늘을 캐나갔다. 둘이서 채 한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동안 어머님과 아버님은 벌써 고랑 하나를 끝내가고 계셨다. 모자 챙 밑으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딸아이의 보들보들한 손바닥은 그새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손바닥만한 밭이라 얕보았던 기억은 맥없이 사라지고 앞에 남은 고랑의 끝이 한없이 멀게 보였다. 

점점 더 뜨거워지는 유월의 햇볕아래 우리 가족은 귀한 육쪽 마늘에 흠집을 내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하며 마늘을 캤다. 땅속에서 추운 겨울을 나며 단단히 여문 마늘은 딸아이의 손 안에 꽉 찰만큼 작았지만 야무지게 제몸을 그러안고 있었다. 깊은 우물 속에서 물을 길어올리듯 공들여 끌어올린 마늘에 상처라도 나 있으면 나와 딸아이는 발을 동동 굴렀다. 
마늘밭에서 시간은 그렇게 천천히, 그 어느 곳에서보다 천천히 흘러갔다. 

하지만 그날 우리는 반나절만에 마늘밭에서 철수해야 했다. 점심을 먹고 난 어머님은 차마 아이들이 안쓰러워 볼수 없다시며 우리를 쫓아냈다. 

가까운 시내에 나가 바람을 쐬고 오후 늦게 시댁으로 돌아오니 대문 앞 마당과 안뜰 가득히 마늘이 널어져 있고, 집안엔 온통 칼칼한 마늘 냄새가 스며 있었다. 아버님은 마늘을 뽑은 자리를 새로 일궈 콩 심을 준비를 하신다며 해가 다 지도록 돌아오지 않으셨다.

저녁 뉴스에선 장마전선이 제주도까지 올라왔다고 알렸다. 화사한 원피스를 입은 어여쁜 기상 캐스터는 다음 주엔 중부 지방까지 장마전선이 북상할 거라고 했다. 어머님은 장마가 오기 전에 마늘을 다 캐서 널었으니 다행이라며 우리를 보고 웃으셨다. 

그날 밤, 나는 기어코 한살을 더 먹었다. 

세월은 결코 부질없지 않았다. 

우리가 견딘 시간만큼 우리는 단단해져 갔다. 낡고 닳아가는 것들 안에는 묵묵히 견고해져 가는 소망이 있었다. 소망이 견고해져 가는 까닭은 종내는 닳아 없어질 끝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끝 후에도 삶이 계속됨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 소망은 내가 사라져간 자리에 여전히 남을 누군가를 향한 것이기에 더욱 간절하였다. 

마흔 두 해 살이만큼의 단단함으로, 나는 그 소망을 힘껏 끌어안았다. 


최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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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목록    [의견수 : 1]
mskang
2016.11.24, 11:45:00
잘 읽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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