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담객설閑談客說: 적는 자 남는다
보스톤코리아  2018-09-24, 10:38:13 
국민학교적이다. 방학과제물이 있었다. 일기를 쓰라 했다. 그리고 제출하라 했다. 친절한 선생님은 읽고 채점한후 돌려줬다. 개학 전날이 되었다. 일기장을 들췄다. 하얀 백지공책이었다. 방학첫날만 반페이지 체워져 있었다. 벼락치기 일기아닌 월기月記를 써야했다. 기록엔 일기日氣를 적어야 한다. 날씨를 말하는데, 만만한 어머니에게 물어야 했다. 인터넷이 있던 것도 아닌바, 그날 날씨를 찾을 수없기 때문이다. 되돌아온 어머니의 퉁박이다. ‘그걸 내가 어떻게 기억하느냐?’ 괜한 꾸지람만 되돌아 왔다. 

일기 내용이란게 별것 없었다. 밥먹고, 놀았다. 아주 이따끔은 숙제하고 놀았다. 이만하면 착한 어린이 아닌가? 하지만, 숙제는 무슨 숙제? 뭘하며 놀았는지 기억에도 없건만. 어른이 되고도 일기는 이따금만  긁적인다. 따로 일기장도 없다. 김시종 시인은 다르다.

사관이 삼가 역사를 적듯 
고요한 밤에 조용히 꿇어앉아 
나의 하루를 적는다. 
일기장에도 참된 나는 없다. 
이 세상 어디에도 참된 
나는 없다. 
나도 모르는 새 
가식의 옷을 입는다.
(김시종, 일기 중에서)

메모의 기술이란 책이 있다. 얇은 책인데, 꼼꼼히 적으라는 것이고, 요점만 적으라는 거다. 그래야 기억할 수있다는 것이고, 잊지 않는다고 했다. 생각이 정리된다고도 했다. 하나마나한 이야기이다. 이 책은 읽으면서 메모도 하지 않았고, 밑줄도 치지 않았으며, 크게 기억나는 구절도 없다. 

James Comey. 미국 전前CIA 국장이름이다. 그가 트럼프 대통령과 면담한후, 메모를 만들었다고 했다. 한동안, 신문지상을 가득메웠던 기사였고 사건이었다. 메모는 그가 살기위해 적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곧 해고됐다. 한국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청와대 고위직 참모들이 남긴 메모가 문제가 되고 있단다. 그게 발목을 잡을 수도 있는데, 법적 증거로도 충분하다고 했다. 한국의 전대통령도 메모광이었다고도 했다. 본인이 그럴바엔, 아래 참모들에게도 강조했던 모양이다. 뇌물을 준 사람들도 꼼꼼히 뇌물장부를 만들었다고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사관史官이 있어, 국사國事를 기록으로 남겼다고 했다. 시작은 사초史草인데, 그 마지막 작업은 세초洗草라 했다. 세초는 기밀누설방지와 종이를 재생, 재활용하기 위한 작업인거다. 세검정이 바로 그 작업터다. 어느 임금이 말을 남겼다. ‘내가 무서워하는 바는 하늘과 사관’ 기록은 임금도 두렵게 한다. 

언제 부터인가 내게 못된 버릇이 생겼다. 무조건 적는다. 차츰 깊어가는 건망증 때문이기도 하다. 한편, 내게 말하는 상대방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그래도 적는 내가 스스로 가상하다. 잊지 않겠다는 필사의 노력인데, 적는자 남는다는 말을 깊이 새기고 있다. 

일기라면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일것이다. 공公이 남긴 난중일기 인데, 담담하면서도 기막힌 기록이다. 자랑할 만 하다.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고린도전서 1:31)


김화옥 
보스톤코리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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