崇禮門 回想
보스톤코리아  2008-02-18, 11:49:09 
김은한  (본지 칼럼니스트)


조선왕조가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고 왕궁(경복궁)을 지을 때 어느 쪽으로 향하는 것이 제대로 하는 것이냐에 대한 의견이 많았다. 그 중에도 무학대사와 정도전은 의견을 아주 달리 하고 있었다. 무학대사는 한강 남쪽에 있는 관악산이나 서쪽에 있는 인왕산의 火氣를 막으려면 宮은 東向으로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반해, 정도전은 중국의 궁궐들이 모두 남향으로 세워졌다며 남향을 고집했는데 결국 정도전의 주장대로 경복궁을 남향으로 세우게 된 것이다.

그대신 관악, 인왕, 도봉산에서 경복궁을 향해 뻗쳐오는 화기로부터 왕궁을 보호하기 위한 풍수 장치를 곳곳에 설치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崇禮門이다. 한양의 東西南北에 四大門을 설치하고 그 사이에 四小門을 만들었는데 四大門의 이름은 종로의 보신각과 곁들여서 유교에서 권장하는 仁義禮智信을 넣어서 풍수지리에 적합한 이름으로 명명하게 된 것이다. 東大門은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西大門은 돈의문(敦義門)으로, 南大門은 崇禮門으로, 北大門은 숙정문(肅靖門)으로(靖은 智와 같은 뜻), 종각(鐘閣)은 보신각(普信閣)으로 이름을 지은 것이다.

풍수지리에서 한양의 경복궁은 남쪽에 있는 관악산의 강한 火氣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南大門을 崇禮門으로 명명한 이유가 관악산의 화기로부터 왕궁인 경복궁을 방어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한다. 崇은 높인다는 뜻이고, 禮는 음양오행 중 불(火)을 뜻한다고 한다. 관악산의 火氣에 대항하는 이열치열의 치료제가 숭례문인 것이다.

남대문의 현판은 가로로 쓴 다른 문들의 현판과는 다르게 세로로 써내렸는데 그 이유는 세로로 쓰면 火氣가 더 충천해서 화염이 솟구치는 모양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崇자는 글자모양도 화염이 솟구치는 형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관악산의 화기를 막는데 숭례문 만으로는 안심이 안되어서 숭례문 밖에 지금의 서울역 근처에 남지(南池)라는 못을 파서 화기를 억제하려고 하였다. 또 숭례문에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光化門)까지 직선 도로를 내지 않고 종각을 경유해서 경복궁에 이르게 한 것은 화기가 직접 경복궁에 미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이조말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할 때 광화문 앞에 불을 먹는다는 해태 한 쌍을 세웠는데 이들이 관악산을 바라보며 불길을 집어 삼킬듯한 형상을 하고 있는 것도 역시 관악의 화기를 막기 위함이었다.

崇禮門은 태조 5년에 축성됐을 때만 해도 크게 일컬을 정도가 못되는 그저 그렇고 그런 성문이었다. 그러나 세종대왕 때 크게 면모를 일신한 후로는 지금까지 610년간을 한결같이 단아한 모습을 지켜오면서 국가의 애환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숭례문은 한양의 正門이면서, 조선의 대문이었기 때문에 중요한 나라손님들은 꼭 숭례문을 통하여 맞아드리곤 했었다. 그래서 中國의 사신들은 꼭 숭례문을 통하여 入京하곤 했는데, 日本의 사신들은 옥수동 나루를 건너 광희문을 통해 들어왔고 여진족 사신들은 혜화문을 통하여 들어 왔다고 한다.

나라의 대문인 숭례문은 낮에는 항상 열려있게 마련이지만, 이 대문도 닫아버릴 때가 있었다. 가뭄이 들 때에는 숭례문을 닫아버리고 북문인 숙정문을 개방하면서 종로에 있는 저자를 남쪽의 구리개나 숭례문 쪽으로 옮기길 반복했다고 한다(移市祈雨). 이것은 양기가 강한 남문을 닫고, 음기가 드는 북문을 여는 것으로 음기를 받아 비를 불러 들인다는 것이다.

4대문 중 숙정문은 풍수지리 사상가들에 의해 수백년 동안 가뭄이 들 때만 빼고는 폐문의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 이유는 이 문을 열어 놓으면 음기(陰氣)가 번성하게 되어 장안의 부녀자들이 놀아나게 되고 도성의 풍기가 어지러워지기 일쑤라서 항상 꼭꼭 닫아두었다고 한다. 이에 비하면 숭례문은 한양과 서울의 正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왔고 지금은 한국의 얼굴이며 상징물이 되게 된 것이다.

조선조 제일의 명필로 일컫는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는 늘 과천에서 서울에 올라올 때면 숭례문 현판 앞에 서서 해저무는 줄도 모르고 현판을 올려 보았다고 한다. 그가 천하의 명필이라고 칭송하는 현판의 글씨가 과연 누구의 필적이냐에 대한 논란이 많았지만 그 주인공은 태종의 맏아들로 왕세자에 책봉되기도 했던 양녕대군의 작품이라는 것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태종실록에 기록하기를 경복궁 안에 경회루를 새로 꾸미고 현판을 당시의 왕세자인 양녕으로 하여금 쓰게 했다는 기록이 있듯이 그는 당대의 명필이었다. 지금 상도동에 있는 양녕대군의 사당(祠堂)인 지덕사(至德祠)에 그의 유묵인 숭례문 현판 탁본이 보존되어 있어서 양녕대군의 작품으로 증명되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도 양녕대군을 지목하고 있다. 숭례문 액자는 임진왜란 때 없어져서 조정에서 새로 써서 달았으나 다는 족족 떨어지곤 하였다. 사람들이 이것을 괴상히 여기던 중에 밤이 되면 남대문 밖 청파(靑坡) 배다리 근처 웅덩이 속에서 서광(瑞光)이 남대문 쪽으로 뻗치는 지라 그 웅덩이를 파내어 보니 원래의 현판이 묻혀 있었으므로 남대문에 다시 달아놓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끈질기게 살아 내려온 崇禮門이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6.25 전쟁 중에도 용케 살아내려온 숭례문의 갑작스런 참화에 우리는 모두 아연하고 슬퍼할 뿐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조상의 문화유산을 복원하는 것 뿐만 아니라 仁義禮智信의 5德을 숭상했던 우리 조상들의 정신문화 유산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며 바로 그것이 崇禮門이 지니고 있는 참뜻이라고 생각한다.

김은한 <본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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