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다시보기-사가현 IV
보스톤코리아  2009-04-06, 16:46:21 
일본 나라현(奈良_)의 텐리시(天里市)의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는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하사했다는 칠지도(七支刀)라는 칼이 있다.

칼의 몸 좌우로 3개씩의 가지칼이 있어서 7개의 칼날이 있기 때문에 칠지도라는 이름이 된 것이다. 제작연대는 백제가 한창 잘 나가던 비류왕(比流王)때로 짐작되는데 칼에 새겨진 60여 개의 명문의 해석을 둘러싸고 한일 학자간에 많은 논쟁을 불러모은 칼이다.

일본의 자의적인 해석은 고대 일본이 가야 지역을 200년간 지배했다는 임나본부설의 근거로, 이 칼은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헌상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북한 김일성 대학의 김석형 교수는 1963년에 발표한 '삼한삼국의 일본 열도 내 분국에 대하여'라는 논문과 1966년의 '초기한일관계사'라는 저서에서 칠지도는 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것을 주장하고 있다.

칼의 앞면에는 '泰口四年5月十日丙午正陽造百練鐵七支刀以口百兵宜供供候王口口口口作' 후면에는 '先世以來未有比口百口口口口口生聖口故爲口王浩傳口口口'으로 되어 있는데 마모된 글자를 학자들이 연구하여 발표한 내용은 '태화4년(서기429년) 5월11일 병오날 정양때에 무수히 담금질한 쇠로 칠지도를 만들어 모든 적병을 물리치도록 후왕에게 주노라. 선세 이래 이러한 칼이 없었는데 백제왕 치세에 기묘하게 얻었기 때문에 성상의 말씀으로 짐짓 왜왕을 위하여 만든 뜻을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라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고대사회에서 칼이나 거울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신표의 성격이 있는 것이다. 이 칼은 백제왕이 왜국의 후왕에게 왜국의 왕위를 인정하는 종속관계의 신표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은 정말로 황당한 얘기다. 일본이 왜국이라는 국명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백제가 망하고 난 다음에 신라 문무왕과 당나라에 보낸 국서에 처음으로 사용했다. 칠지도가 제작되고 나서 300여년이 경과되고 난 다음이다. 300년 후에 사용한 국명을 미리 땡겨서 '임나일본부'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말이다.

일본 고대 역사학의 태두인 교토 대학의 우에다 마사키 교수는 "백제왕이 후왕인 왜왕에게 보내는 칼이다. 칼에 새긴 글투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전하는 하행문서(下行文書) 형식의 명문이다."라고 단정했다. 우에다 박사가 집으로 몰려온 일본 국수주의 청년들로부터 협박을 당한 것은 물론이다.

어찌됐든 백제 비류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와 무령왕이 게이타이 제왕(第王)에게 하사한 인물화상경으로 백제와 왜국의 종속관계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학자들은 백제가 왜국을 제대로 지배한 것은 16대 오진(應神)왕때부터라고 한다.

오진 천황의 전신초상화를 보면 도포를 입고 남바위를 쓰고 있다. 남바위는 가죽을 댄 기다란 모자로 우리 조상들이 겨울철 방한모로 착용해 오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아주 생소한 모자인 것이다. 오진왕은 서기 396년에 북규슈에 상륙하여 백제 담로국을 세웠고 이어서 나니와(지금의 오사카) 지역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가시하라(疆原)시에 도착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최진의 한일 고대사).

그 지역이 지금도 국가를 의미하는 한국말인 나라(奈良)로 불리는 것은 한반도 사람이 그곳에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도쿄대 사학과 이오누에 마쓰사다 교수는 "칠지도를 백제왕으로부터 전해 받은 왜왕은 백제 왕족인 오진왕이며 천황씨(天皇氏)자체가 한반도에서 온 이주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오진왕은 백제로부터 왕인 박사를 공식 초청해서 제 4왕자 오사사기에게 글을 가르치게 하였는데 오사사기가 오진왕의 뒤를 이어 17대 닌토쿠(仁德)왕이 된 것이다. 그는 백제로부터 백제신의 신주를 모셔왔는데 풍토기에 이르기를 "미시마에 계신 어명은 와다시 노오카미(和多志大神)이시다.

이신은 나니와의 다가쓰 노미야(高津宮)에 닌토쿠 천황이 계시던 어세에 나타나셨다. 이신께서는 구다라(백제)로부터 건너 오셔서 나니와쓰의 미시마에 계시게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미시마는 오사카의 미시마카오(三島鴨神社)를 말한다.

백제 무령왕의 성이 화(和)씨이고 일본 간무왕의 생모 이름이 화신립(和新笠)인데 백제신의 이름이 화다지(和多志)인 것을 보면 화다지 신을 모신 닌토쿠 천황도 백제사람임에 틀림 없는 것이다. 실제로 왜국에 살고 있던 백제 왕족들은 처음에는 화씨(和氏=야마토)라는 성씨를 쓰다가 천황가와 결합한 후에는 쿠다라노고니시키(백제왕)라는 성씨로 부르게 되었다.

와세다 대학의 미즈노유 교수는 일찍이 오진 천황과 그 아들 닌토쿠 천황이 백제 왕가로부터 건너와 일본 정복 왕조를 이루었다고 단정하고 있다. 닌토쿠 천황 다음에는 그의 아들 리추(18대), 한메이(19대)를 거쳐 그의 손자들로 대를 이어가며 백제왕족의 피가 자연스럽게 일본 천황가로 수혈되게 되는 것이다. 특히 백제 무령왕의 동생인 26대 게이타이 천황 때부터는 100년 이상 백제 왕족으로 일본 천황이 승계된다.

게이타이 천황 사후에는 목자원(目子媛)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자 안한(安閑)과 둘째 아들 선화(宣化) 왕자가 천황위를 계승했으나 모두 2~3년 내에 사망하고 539년에 무령왕의 딸 수백향과 계체 천황 사이의 적자가 천황위에 오르니 그가 29대 긴메이(欽明) 천황이다. 백제 무령왕의 외손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1황후 5비를 두었는데 왕후는 자신의 배 다른 혈육 선화 천황의 공주 석희(石姬)이고 첫째와 둘째 비는 석희의 두 동생들이다. 그러니까 긴메이 천황은 자신의 조카 세명과 차례 차례 혼인을 한 것이다. 셋째와 넷째의 비는 당대의 세도 대신 소아도목의 두 딸 '견염원'과 '소자군' 이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소아도목(蘇我稻目)에 대하여는 또 다른 설명이 필요하다. 백제의 개로왕이 장수왕에게 죽음을 당할 때 문주왕이 목협만치(木協滿致)라는 신하를 데리고 웅진(공주)을 도읍으로 정하고 백제를 재건하게 되는데 이 목협만치가 왜국으로 와서 웅략천황 밑에서 출세하여 대신이 된다.

그가 자리를 잡고 터전을 잡은 곳이 소가(蘇賀)지방이라서 소가만치로 이름을 바꿨다가 나중에는 소아(蘇我)로 또 바꾸는데 이 '소아' 집안이 무려 115년 동안 대를 이어가며 천황의 권위를 위협할 정도의 막강한 권한을 장악하게 되며, 소아 집안의 여자들이 의례히 천황의 비가 되는 것이 다반사가 되게 된 것이다.

긴메이 천황에게 견염원과 소자목 두딸을 시집 보내는 소아도목은 소아만치의 손자가 된다. 긴메이 천황이 사망하고 나서는 석희왕후 사이에 출생한 비타쓰(敏達)가 30대 천황에 즉위한다. 역시 대신은 소아만치의 5대손이 되는 소아마자(蘇我馬子)가 차지하게 된다. 비타쓰 천황은 부왕 긴메이 천황의 딸로 자신의 이복 동생인 가시키야 공주와 근친 결혼을 하는데 둘 사이에 2남 5녀를 두게 된다.

여기서 한번 비타쓰 천황의 혈통을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일본 고대 왕족의 족보인 신찬성씨록에 보면 일본 왕족 30개 가문 중에 12번째에 비타쓰 천황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적혀 있다. 해석하면 "대원진인(大原眞仁), 그의 조상은 시호가 비타쓰(敏達)라는 백제 왕족이니라. '속일본기'에도 부합한다."고 되어 있다.

비타쓰 천황이 백제 왕족이니 그의 아버지인 긴메이 천황이나 그의 후손도 백제 왕족임에 틀림 없다.비타쓰 천황이 사망한 다음에는 긴메이 천황과 소아도목의 딸 견염원 사이에서 태어난 용명(用明)이 31대 천황으로 즉위하고 뒤를 이어 긴메이 천황과 역시 소아도목의 딸 사이에서 난 수준(崇峻)이 32대 천황으로, 그 다음에는 비타쓰 천황의 이복동생으로 그의 왕후였던 가시키야 왕후가 서기 592년에 왜국 최초의 여왕으로 추대되는데 바로 33대 스이코(推古 592~628) 천황이다.

그녀는 용명천황의 2째 아들인 쇼도쿠(聖_) 태자를 섭정으로 세워 재위 36년 간에 백제 불교 문화를 눈부시게 꽃 피운 아스카 문화 시대(592~645)를 열게 된다. 일본의 불교 왕조사인 부상략기(扶桑略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588년 백제 왕실에서 건너온 건축가들에 의해 왜국 최초의 가람이 아스카에 착공 되었다.

스이코 여왕과 만조 백관이 백제옷을 입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기뻐하는 가운데 백제에서 보내온 부처님의 사리함을 찰주의 기초 속에 안치했다." 모든 것이 백제로부터 시작하여 백제로 끝나고 있다. 스이코 천황 다음에는 비타쓰 천황의 증손인 34대 죠메이(舒明)천황이 즉위하는데 그는 백제 의자왕의 딸 부여보와 결혼하고, 그녀가 후일에 황극 천황이 된다.

그 뒤는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경이 효덕 천황으로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백제가 망했을 때 일본 왕실에서 실망 속에 했던 말이 일본 서기에 적혀 있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장이다. 우리 조상의 묘를 찾아 갈 수가 없구나." 일본 왕실의 조상은 백제 왕실이라는 것을 고백한 것이다.

일본 왕가가 백제 왕가를 이어 받았다는 것을 고증할 수 있는 근거로는 간무 천황이 자신의 조상을 제사지내려고 교토에 세운 히라노(平野) 신사에 모셔진 신(神)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 히라노 신사에서 역대 천황들이 쇼와 천황 때까지 매년 4월에는 신행제(新幸祭), 11월에는 신상제(神嘗祭)를 드리고 있다.

히라노에서 모시는 제신(祭神)은 모두 6명인데 첫번째가 이마키신(今木神=긴메이 천황), 두번째가 구도신(久度神=온조왕, 구태왕), 세번째가 후루아키신(비류왕과 근고초왕), 네번째가 히메신(比賣神)으로 간무천황의 생모인 화신립(和新笠) 황태후다. 이 여섯신이 일본 황실의 조상신들로 일본 천황들이 매년 두번씩 제사를 드리고 있다. 모두 백제의 개국 시조이며 중흥 시조들이다. 왜 모두가 백제신들인가? 그 이유는 일본 천황가가 백제 왕가의 피를 물려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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