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카 백제 문화를 찾아서: 아스카 문명의 주인공 소가(蘇我) 가문
보스톤코리아  2011-07-11, 16:02:35 
개로 왕이 죽고 문주왕(文周王)이 웅진 백제를 세우는데 목리만치(木刕滿致)가 도와 주었다는 것만 삼국사기에 적혀 있다.

장차 일본 열도에 소가 왕국의 창시자가 되는 사람에게 할애된 우리나라의 기록이 고작 이것뿐이라니 놀랍다.
일본 서기에는 그의 출생기까지 기록되어 있다.

백제기에서 말하기를 근초고왕, 근구수왕 때 백제의 목라근자(木羅斤資)장군이 가야와 신라를 공격해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고 신라여인을 맞아 목리만치라는 아들을 가졌다고 한다.
응신(270-310)기 25년에 백제의 직지왕(直支王=月典支王)이 사망하고 구이신
이 왕이 되었다.
“목만치(목리만치)가 국정을 잡았는데 왕모와 간음하여 무례함이 많았다. 천황(응신)이 듣고 불렀다(백제기)”고 목만치를 일본으로 불러들인 전말을 기록하고 있다.

일본서기에서 이러한 기록이야말로 황당한 기록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응신기 25년이면 서기 295년이다. 개로 왕이 사망하고 목만치가 문주왕과 함께 웅진으로 천도한 때가 서기 475년이다. 사실과는 200여 년의 차이가 난다. 너무나도 심한 왜곡이다.
그러나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사실은 목만치가 일본으로 갔다는 사실일 것이다.
스이꼬 천황의 풍포궁. 원래는 소가노 이나메의 개인집이었다
스이꼬 천황의 풍포궁. 원래는 소가노 이나메의 개인집이었다
 
곤지왕자가 가와찌 왜로 건너간 때가 서기 461년이고 목만치가 왜국으로 건너간 때는 리중(泥中)천황 때로 곤지왕자가 왜국으로 건너가고(461) 나서 16년 후에 가와찌의 이시까와(石川)계곡에 나타난다.
일본서기 리중기에 목만치는 벌써 대신이 되어 3명의 다른 중신들과 함께 국사에 전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가 맡은 벼슬은 사주(使主)라는 직함으로 지금의 외무장관과 같은 역할이었다.
그가 왜국에 오자마자 중직을 맞게 된 것은 그가 최고 권력자의 비호를 받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 권력자가 곤지왕이라면 납득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가와찌 아스카에 백제 사람들이 계속 밀려 들어오자 이들은 다께우찌(竹內㟁) 고개를 넘어 동쪽의 야마토 아스카(나라 아스카, 또는 먼 아스카)로 옮겨가게 되었고 목만치 가족도 나라 평원의 다께찌군(高市郡), 가시하라시(橿原市), 소가정(曾我町)에 다시 정착하는데 속일본기에는 이 지역을 이마끼(今來君)군이라고 불렀다. 새로운 개척민들이 들어와 군이 새로 생겼다는 뜻이다. 지금은 코세시(巨勢市)로 되어있다.
목만치 가족들은 그들이 소가정(曾我町)에 거주하기 때문에 성을 소가로 바꾸는데 한자로는 蘇我, 曾我, 宋我, 蘇賀 등 여러가지로 쓰지만 발음은 모두 소가로 한다.

그 당시 이마끼 군에 사는 사람들의 80% 이상이 소가씨가 아니면 가야계 도래인인 아야 씨였다고 하는데 아야 씨 성을 가진 집이 7천호가 넘었다고 한다. 소가 씨들은 이곳에서 아야 씨들과 힘을 합쳐 야마토 아스카를 주도하는 세력이 된다.

목만치 자손들의 이름을 듣게 되면 그들이 한반도에서 도래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아들 이름이 소가노 가라꼬(蘇我韓子), 한반도 사람이다. 손자는 소가노 코마(高麗), 증손자가 소가노 이나메(稻目)로 벼농사의 대가라는 뜻이다. 왜국의 벼농사는 한반도로부터 배웠다는 뜻이다.
실제로 그는 사방에 있는 둔창(屯倉)의 관리자였다.

그 다음이 소가노 우마꼬(馬子), 일본에는 원래 말이 없었다. 오진 천황 때 아직기가 암수 말 2마리를 왜국에 가져온 것이 왜국 말의 효시가 된다.
당시 왜국인들은 말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무척 큰 개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 다음이 소가노 에미시, 마지막이 소가노 이루카인데 이루카가 살해됨으로써 110년간에 걸친 소가 씨의 권력 독점이 끝나게 된다.

소가 씨의 몰락을 대화개신(大化改新)이라고 한다.
소가 씨가 가와찌에서 야마토로 이주한 또 하나의 이유는 가와찌의 백제계 아스까베 왕국과 야마토에 있는 천황 족의 신라계 미와 왕국이 통합하게 되어서 야마토(지금의 나라)로 옮겨 앉은 것이다(승천석의 아스까베 왕국).

백제 무령왕이 게이타이 천황에게 보낸 스타하치망 신사의 인물화상경
백제 무령왕이 게이타이 천황에게 보낸 스타하치망 신사의 인물화상경
 두 나라가 통합함으로 인해 미와에 왕국은 신흥 국으로 성장하는 아스까베 왕국에 편승할 수 있었고, 아스까베 왕국은 천황 족과 합침으로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
주목할 사항은 백제와 신라의 도래 인들이 왜국에서 통합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 천황가에서는 매년 두 명의 신라 신과 한 명의 백제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백제 무령왕 때에 왜국에서는 그의 동생 “게이 타이”가 천황으로 옹립되었다. 무령 왕은 게이타이의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503년에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을 보냈다.
인물화상경에 기록된 명문에 “계미년(503년) 8월 10일 대왕의 연간에 남동생인 왕을 위하여 오시사카궁(忍坂宮)에 있을 때 사마께서 장수를 염원하여 보낸다”라고 적혀 있다. 이 글에서 화상경을 보낸 사마는 백제 무령왕이고 계미년(503)의 왜왕은 게이타이왕이었다. 게이타이왕은 현 일본 천황가의 시조로 백제 무령왕의 동생이라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게이타이 천황은 무령 왕의 딸 수백향(手白香)을 황후로 맞이 하였다
게이타이 천황의 장남이 27대 안칸(安閑) 천황이고 차남이 28대 센카(宣化)천황이 되었다.
센카 천황 때 목만치의 증손자 소가노 이나메(稻目)가 대신이 되었다. 센카 천황이 사망하고 계체천황과 수백향 황후 소생인 긴메이(欽明)가 천황이 된다.

계체천황은 무령 왕의 동생이고 수백향은 무령 왕의 딸이니 긴메이 천황은 100% 백제 왕가의 피를 받은 천황인 셈이다.
긴메이 천황의 즉위로 실리를 챙긴 사람은 가와찌 왕국 출신의 소가노 이나메(諂目)였다. 이나메는 소가 집안이 왕실과 적극적인 혼인을 해서 왕가와 소가 가를 한 집안으로 만들 속셈이었다.
긴메이 천황은 6명의 비빈을 두었는데 황후는 전왕 센까(宣化)천황의 딸 석희(石姬)였는데 둘째 아들이 후에 비타쓰 천황이 된다.

다섯 명의 비(妃)중에서 2명은 역시 센까 천황의 딸들이었고 3번째 비(妃)는 소가노 이나메의 딸 견염원(堅鹽媛)이었는데 7남 6녀를 낳았다.
긴메이 천황의 4번째 비(妃)가 역시 소가노 이나메의 딸 소자군(小姉君)으로 4남 1녀를 두었는데 막내 아들이 슈순(崇峻)천황이 되고 첫째 딸은 요메이(用明)천황의 황후가 되어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어머니가 된다.
긴메이 천황의 아들딸 중에서 2쌍이 남매간 근친 결혼을 한 것이다.

소가노 이나메의 외손(요메이, 스이꼬, 슈슌)중에서만 3명의 천황이 나왔다.
이나메의 아들 소가노우마꼬(馬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의 딸들이 성덕태자의 비(妃)가 되고, 죠메이(舒明)천황의 비(妃)가 된다.
소가노 에미시의 동생 구라야마 다마로(倉山田麻宮)는 두 딸을 천지(天智)천황의 빈으로 보내서 지통(持統) 천황과 원명(元明)천황을 낳았다.

그 뒤로 효덕(孝德)천황과 천무(天武)천황의 비도 소가씨 가문의 여인들이었다.
야마토 아스카 시대의 거의 모든 천황들이 소가 집안의 딸들과 혼인관계가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이것은 소가씨 딸들이 천황의 비빈이 되는 순서가 아니고 왕들이 소가 집안에 장가를 들어서 왕(천황)이 되는 것이다. 지금도 소가씨들이 살던 저택, 유적은 찾아볼 수 있지만 천황의 궁터는 스이코 천황의 풍포궁을 빼고는 찾을 수가 없다. 스이코 천황의 궁터도 사실은 소가노 이나메의 개인 집에 불과하였다.

엄밀하게 따지면 야마토 아스카의 천황들은 사실상 소가씨 가문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가와찌에는 백제 사람들이 묻힌 공동 묘지가 두 곳에 있다. 하나는 아스까베 신사 남쪽의 서반부에 있는 이찌스가(一順賀)고분 군과 그 동반부에는 소가씨 시대의 소가 씨들과 천황들의 무덤들이 있는 태자정 무덤 군이 거의 한 골짜기에 모여있다. 실은 이곳이 소가 집안의 선산이었다.

태자정 무덤 군에는 4명의 천황 비타쓰(敏達), 요메이(用明), 스이꼬(推古), 효덕(孝德)천황과 성덕태자 묘, 오쯔황자 묘, 스이꼬 천황과 요메이 천황의 어머니이고 소가노 이나메의 딸인 견염원의 무덤이 있다.
또 소가씨 집안의 무덤으로는 소가노 에미시, 소가구라야마다 무덤이 있고, 우마꼬의 기념 탑이 있다. (승천석의 아스까베 왕국) 소가씨 선산에 천황들의 무덤이 들어와 있다. 이것은 야마토 아스카의 천황들도 소가씨 가문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일본에는 오꾸쯔기 원칙이란 것이 있다.
즉 천황 및 황족과 귀족들은 죽은 다음에는 본관에 묻힌다는 풍습을 말한다.
야마토 아스카 천황들의 본관은 소가씨 선산이었다.
곤지 왕자가 찾아오고, 목리만치가 바다를 건너 찾아온 이시까와(石川)골짜기에 야마토 아스카의 주인공들이 함께 잠들어 있다.


소가 씨와 왕실과의 관계 계보
1) 소가노 이마메(蘇我稻目)의 자손
1. 딸 견염원긴메이(欽明) 왕 비(妃)
요메이(用明) 왕과 스이코 여왕을 출산
2. 딸 소자군긴메이 왕비
스준(崇峻) 왕 출산
3. 딸 석촌 명요메이 왕의 빈(嬪)
성덕태자 출산
2)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1. 딸 刀自古郞女성덕태자비
2.딸 法提郞媛 조메이(舒明) 왕후
3) 이시카와 마로
(石川麻呂: 소가노 이루카의 동생)
1. 딸 원지랑텐지(天智) 천황빈
지퉁천황 출산
2. 딸 질랑(姪郞)천지천황빈
원명(元明) 천황 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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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한 칼럼니스트    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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