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카 백제 문화를 찾아서 : 16. 아스카의 꽃 법륭사(法隆寺) 3
보스톤코리아  2011-11-14, 12:08:11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3개의 불상이 있다. 첫째는 법륭사 몽전에 안치되어 있는 구세관음상이고, 두번째는 역시 법륭사에 있는 백제관음상이다. 세번째 불상은 교토 광륭사에 있는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으로 일본 국보 1호로 등재되어 있다. 3개의 불상이 모두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구세관음상은 백제 위덕왕(威德王) 때 백제에서 만들었다. 일본 학자들은 늘 하는 습관대로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일본에서 만들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외국어 대학 홍윤기 교수가 법륭사의 고문서인 성예초(聖譽抄)에서 확실한 사실을 찾아 내었다. 성예초는 오우에이(應永) 연간(1394-1427)에 편찬된 것으로 1786년에 호류지의 학승 센항(千範)이 필사한 것이다.

그 내용은 “백제 위덕왕이 서거한 부왕인 성왕(聖王)을 그리워하여 그 존상(尊像)을 만들었다. 그것이 구세관음상으로 백제에 있었던 것이다. 성왕이 죽은 뒤 환생한 사람이 일본의 상궁 성덕태자(上宮聖德太子)이다. 상궁태자의 전신(前身)은 백제 성왕이다. 성예초보다 먼저 나온 사서(史書)인 부상략기(扶桑略記 )에도 그 사실이 밝혀 있다.

스이코(推古) 천황 원년에(593) 아스카에 아스카사(法興寺,飛鳥寺)를 세우면서 찰주(木塔)를 건립할 때 조정의 백관들이 백제옷을 입고 참석했다고 하면서 “금당에 안치된 금동(金銅) 구세관음상은 백제 국왕이 서거한 뒤에 국왕을 몹시 그리워하면서 만든 불상이다. 이 불상이 백제국으로 부터 불경, 율론(律論)이며 법복 여승들과 함께 왜 왕실로 건너 왔다.”(推古元年條). 이로써 구세관음상이 처음에는 아스카사에 있다가 법륭사의 몽전으로 옮겨 간 것으로 짐작된다.

호류지 동원(東院)에 있는 몽전(유메모또,夢殿)은 서기 739년 경에 교신 소오즈(行信僧都)라는 고승이 성덕태자의 유덕을 흠모하여 상궁왕원(上宮王院)이라는 가람을 세웠는데 그 중심에 한반도 별당을 닮은 8각형 건물이 몽전이다. 지금 몽전의 중앙에는 비불 구세관음상(秘佛救世觀音像)이 안치 되어 있다. 원래 이 불상은 그 이름이 말해주듯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는 비불(秘佛)이었다. 200여 년간 아무도 이 불상을 본 사람이 없었다. 검은 상자에 잠겨 있는 채로 봉안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명치유신 초기에 일본 고대 미술의 발견과 발굴에 공이 큰 어네스트 페노로사(Ernest Fenollosa) 씨가 비불의 모습을 세상에 공개하였다. 페노로사는 스페인 계 미국인으로 하버드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1884년에 고대미술을 연구하기 위해 일본에 가 있다가 귀국해서 Boston 미술관의 동양 미술 부장이 된 사람이다.

그는 일본에 있을 때 일본 정부로부터 고대 사찰을 감독하고 연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았고 그 연고로 법륭사에 가게 된 것이다. 그가 법륭사 스님에게 관음상이 모셔져 있는 상자를 열어 줄 것을 부탁했을 때 스님의 대답은 만약 상자를 열면 부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큰 벌이 내려 절의 사탑이 무너질 것이라며 거절하였다.

당시 스님이 알고 있는 것은 이 비불이 백제로부터 전래 된 스이코 천황 시대의 불상이며 200년 동안 한번도 모습을 들어 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기나긴 줄다리기 끝에 스님이 상자의 녹슨 자물쇠를 열었을 때 그 속에는 무명천이 겹겹이 감고 있는 물건이 있었다. 페놀로사 씨가 무명천을 풀어 갈 때, 우연히 하늘에서 천둥 소리가 났는데 지켜보던 승려들이 혼비 백산하여 도망쳤다고 한다.

조심 스럽게 무명천으로 감싼 속에는 오랜 세월 쌓인 먼지가 휘날리어 질식할 것 같았다. 위험을 무릅쓰고 거의 500 야드 정도의 무명천을 모두 풀었을 때 조각상이 나타났다. 그 때 그가 반사적으로 내 뱉은 말이 “Korean, of course”였다. 그는 이 불상이 일본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중국 것도 아니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 보었다. 당시 서양에서는 동양문화 하면 중국과 일본이었다. 아스카 일본 문화가 한반도 사람들이 일구어낸 문화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동양문화에서 한반도의 문화는 거론조차 안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명치유신 이래로 일본의 학자들은 한국문화가 일본에 예속된 것이라는 주장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놀로사 씨의 “Korean of course”라는 한 마디로 우수한 한국문화가 알려지게 된 것이다.

불상의 높이는 1.805m, 바로 성덕태자의 키하고 일치한다. 당시에 일본 남자들의 키가 5피트였는데 왜 성덕태자의 키는 1.8m나 되었을까? 성덕태자도 한반도 기마 민족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불상의 머리에 쓴 관에서 왼쪽 가슴까지 늘여뜨려진 장식물이 있는데 오른 쪽 것은 분실돼서 없어져 버렸다. 만약에 이 불상이 일본에서 만들어 졌다면 없어진 부분을 다시 만들어 복원했을 것이지만, 한반도에서 만들어온 불상이기 때문에 일본의 독자적 기술로는 복원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경주에서 발굴됐던 불상은 오른쪽, 왼쪽 양쪽 다 늘어 뜨려진 장식물이 있었다. 하와이 대학 동양 미술학 Jon Corvell 교수의 구세관음상에 대한 평론을 옮겨 본다.

곡선을 그리고 있는 눈썹의 부드러운 눈매와 얼굴의 윤곽은 삼국 통일 전에 한강 이남의 조각 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높은 광대 뼈와 높은 콧날은 이 불상의 모델이 한반도 사람 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일본인 고유의 불상은 콧날이 낮은 것이 보통이다. 또 통일 신라나 일본 고유의 불상은 얼굴이 구세관음상처럼 갸름하지 않고 통통한 모습이다.

눈매가 부드러운 것이 백제 불상의 특징이다. 중국 북위의 불상은 눈매가 사납다. 백제의 불상은 옷주름이 얇은 것이 특징이다. 고구려의 불상은 옷주름이 깊은데 이것은 고구려가 백제보다 추운 곳이라서 옷주름도 깊은 것이다.
불상 광배에 보이는 불꽃무늬나 인동초 무늬도 백제 불상의 특징으로, 구세관음상은 백제에서 만들어진 불상이다.

일본의 민예 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 柳宗悅)씨는 “조선과 그 예술” 에서 언급하기를 “일본의 국보로 세계에 자랑하고 있는 작품의 대부분은 도대체 누구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국보의 대 부분은 한민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의 국보로 불리기 보다는 정당하게 한국의 국보라고 부르지 않으면 않된다.” 라고 말했다. 일본 사람들 중에는 양식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에 일말의 위안을 삼고자 한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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