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카 백제 문화를 찾아서 : 20. 도시샤(同志社) 대학의 윤동주(尹東株) 시비
보스톤코리아  2011-12-20, 12:20:48 
도시샤 대학은 1920년 관서지방에 최초로 세워진 유서 깊은 대학이다. 윤동주 시인은 1942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릿교(立敎)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6개월 후 교토 도시샤 대학 문학부로 전학하였다.
1943년 여름 방학 때 고향에 가기 위해 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다가 그를 감시하던 사상계 형사에게 검거되었다. 한글로 시를 쓴 사상범으로 1944년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1945년 2월 16일 해방을 6개월 남기고 형무소에서 의문사를 당하고 말았다. 그가 유명을 달리 한지 50년 째 되는 1992년 2월 16일에 동지사 대학 교우 모임인 코리아 클럽의 발의로 윤동주 시비가 대학 교정에 세워지게 되었다.

도시샤 대학을 가려면 지하철 카라스마 선을 타고 이마데가와(今出川) 역에서 내리면 된다. 3번 출구로 나와 오른쪽(북쪽)으로 가면 대학 서문이 되고 왼쪽으로 가면 정문이 나온다. 길 건너에 일본 천황이 거주하던 교토 어소(京都御所)가 길게 늘어서 있어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다. 정문 수위실에서 윤동주 시비를 보러 왔다고 하니 수위가 익숙한 표정을 지으면서 금방 교내 약도를 내 주는데 시비까지 가는 길이 이미 붉은 색으로 줄이 쳐져 있었다.

대학 구내는 교토의 근대화를 상징했던 붉은 벽돌 건물이 총총이 늘어서 정문에서 150m 거리에 대학 예배당과 해리스 화학관 건물 사이에서 윤동주 시비를 찾을 수 있었는데, 시비 앞에는 누군가 벌써 와서 꽃을 챙겨 놓고 갔다. 시비는 윤동주의 친 동생인 성균관대 윤일주 교수가 설계 하였다고 하는데 대리석 위에 흑색 판돌을 붙이고 그 위에 그의 대표작 서시(序詩)를 새겨 놓고 그 옆에 일본말로 번역을 해 놓았다. 윤동주가 사망하고 3년 후에 그의 유작 30편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라는 제목으로 간행되면서 윤동주라는 이름이 세상에 알려 졌고 그의 시가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 전역에 알려 지게 되었다. 지금은 그의 시가 일본, 중국, 영어, 불어, 체코 말로 번역되어 세계가 알게 된 것이다. 시비에 실려 있는 그의 서시를 적어 본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 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여기서 바람은 현실의 시련이고 밤은 암울한 시대 상황이라고 한다. 국내에서는 윤동주 시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여 40여 명이 윤동주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그에 관한 논문이 300 여편에 달한다.
1969년에 그의 모교 연세 대학 구내에 윤동주 시비가 건립되었고 그의 고향 용정에도 그의 시비가 건립되었다. 윤동주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의 조국만이 아니다. 그를 죽게 한 일본의 시민들도 윤동주를 기억하고 있다. 교토에 윤동주 기념비를 세우려는 건립위원회가 생겼고 윤동주와 관련이 있는 교토, 도쿄, 후쿠오카에는 윤동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다. 최근에는 윤동주의 시가 일본 고등학교 3학년 교과서에 실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윤동주 시비 오른쪽에는 10m 사이를 두고 또 하나의 시비가 서 있는데, 윤동주보다 20 여년 앞서 도시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정지용 시인의 시비였다. 정지용의 시비는 그가 크고 자란 충청북도 옥천군 에서 화강암에 그의 시 “압천(鴨川)” 을 새겨 보내 2005년에 세운 것이다.

윤동주는 생전에 정지용의 시를 애송하고, 정지용을 흠모해서 도시샤 대학으로 그것도 정지용이 다녔던 영문과를 택해 전학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제 윤동주는 정지용 시인을 옆에 두고 함께 시혼을 가다듬고 옛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정지용은 한국의 대표적인 서정시인으로 주옥같이 아름다운 많은 시들을 남겼지만 친북 작가로 분류되어 그의 작품에 접근이 금기되어 왔었다. 그러나 88 올림픽을 계기로 해금되었고 그의 대표시 ‘향수’가 1989년에 테너 박인수와 이동원이 함께 불러 온 국민을 매료 시켰으며, 이제는 한국인들이 즐겨 부르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대표적인 노래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넓은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여기서 정지용 시인 얘기를 끝내고 윤동주 시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19세기 말에 함경도와 평안도에 기근이 심해지자 국경을 넘어 간도와 연해주로 이주하는 조선 사람들이 많았다. 윤동주네 집안도 그의 외삼촌 김약연 집안과 함께 네 가문이 집단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곳이 용정에서 남쪽으로 15km 떨어진 명동촌이었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명동촌(지금의 용정시 지산진)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 젖이 부족하자 같은 해에 태어난 문익환의 어머니 김신묵 여사의 젖을 함께 먹으면서 자랐다고 한다.

명동 소학교를 졸업 하고 용정에 있는 은진 중학에서 고종 사촌 송몽규, 동갑내기 친구 문익환 등과 같이 공부하다 숭실 중학 3학년으로 함께 편입하였다. 1936년에 일제가 숭실 학교에 신사 참배를 강요하자 이에 저항한 숭실 학교 교장을 파면해 버렸다. 이에 항의 해서 윤동주와 문익환이 자퇴하고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 중학을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부친이 의사가 되기를 바랬지만 단식까지 하면서 연희 전문 문과를 택하였다. 연희 전문을 졸업하면서 그동안 집필한 19편의 시를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라는 제목의 시집을 내려 했으나 이양하 교수가 시기 상조라고 만류해 출간을 포기하였다. 바로 이 시 묶음의 서문격으로 쓴 시가 유명한 서시(序詩)다.

연희 전문을 졸업하고 릿교 대학에 입학한 후 형무소에서 이름 모를 주사를 맞고 사망한 것은 이미 밝힌바 있다. 1945년 윤동주의 주검을 수습 하러 후쿠오카 형무소에 갔던 큰 아버지 윤영춘 교수(통기타 가수 윤형주의 부친)는 함께 수감 되었던 동주의 고종 사촌 송몽규를 면회했는데 그 자신도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는데 지금 몹시 아프다고 하면서 동주도 주사를 맞고 앓다가 죽었다고 전하였다. 송몽규 자신도 3주 후에 사망하였다. 윤동주가 사망한 원인은 미국 정부가 보관하고 있는 요코하마 전범 재판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후쿠오카의 규슈 제대 의학부는 산사람의 혈액을 뽑아 낸 뒤 바닷물을 주입하는 생체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책임자 이시야마(石山)의사는 전범으로 기소 되어 취조를 받다가 자살해 버렸다.

지난 1월 20일에 방영된 유재석, 김원희의 “놀러와” 에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의 세시봉 친구들이 출연했는데 윤형주가 형님의(윤동주)시에 노래를 붙여 보고자 아버지(윤영춘 교수)에게 말씀 드렸더니 혼연히 허락하실 거라는 예상과 달리 완강히 반대하셨다. 대답은 “시도 노래다. 아서라 시 다칠라.” 그래서 한번도 윤동주 시에 손을 대지 못하고 “윤동주 님에게 바치는 노래” 만 만들었다고 한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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