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는 가라
보스톤코리아  2014-04-21, 12:23:17 
젊은이에게 수염은 나이 들어 보이게 한다.  늙은이에게 수염은 나이를 헷갈리게 한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말이다. 헌데 수염은 관리하기 여간 성가신게 아닐 게다. 돌보지 않는다면 지저분해질터. 기르느니 않으니만 못할지 모르겠다. 수염기르는 것도 부지런해야 한다. 겉도 잘 가꿔야 한다.

대학에 진학해서 첫해 늦은 봄이다. 재수하던 동창을 만났다. 단 두어달 남짓 동안 들었던 폼나는 말을 전해 줘야 했다. 불타는 사명감이다. 

 ‘사일구 의거가 미완성의 혁명 이란걸 아느냐. 그리고 그혁명은 아직 진행형이고.’

멀뚱 멀뚱. 미완성은 뭐고, 진행형은 뭔가? 미완성교향곡은 들어 보았다만, 진행형은 영문법에서 나오는 이야기 아냐? 그 친구 표정이 그랬다. 이 품위品位 있는 언어. 차원 높은 담론. 그날 난 완전히 중견 논객이요, 동경유학생이 되었다.

사일구가 내일 모레다. 신동엽 시인이다. 난 김수영시인인가 착각했더랬다.

껍데기는 가라./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껍데기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한라에서 백두까지/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중에서) 

서울근교 산에 등산을 갔다. 이태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다. 몇몇 동창들과 동행했다. 등산이라기보다 오히려 하이킹정도라기에  따라나섰다. 등산객이 오르고 내리는게 줄이 길고도 멀었다.  발디딜 틈이 없다는 표현은 과장인데, 산은 몹씨 붐볐다.  

도대체 등산객이 왜이리도 많으냐고 내가 물었다. 대답은 한산했다. ‘할일들이 없어서.’  토요일이었는데, 전철 안이건 전철역이건 모두 등산복차림이다.  누구 말대로 등산복색이 모두 화려하고, 명품이며, 중장비로 갖췄다.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장비라 하더라. 그나마 셀파는 없으니 다행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불평하고, 나무랄 일은 아니다.  가벼운 등산이라해도 반드시 복장을 갖춰야 하기 때문일게다. 등산은 등산 일테고, 그게 산에 대한 예의이고 등산의 기본일거라 우긴다. 

골프에서도 야구에서도 복장을 갖추지 않던가. 그럼 등산하는데 등산화를 신지, 샌들을 끌고 가랴? 산에 가는데, 등산복 입고 가지, 수영복입고 가랴? 헌데, 등산은 등산인데, 웬만한 산길은 모두 계단이더라.  흙을 밟기가 어려웠고 조심스러웠다. 

껍데기는 보내야 한다. 껍데기는 벗겨야 한다. 호두나  도토리는 껍데기를 벗겨야 먹는다. 하지만, 껍데기도 중요하고 필요할 때가 있다. 형식이 내용을 좌우한다 했던가. 그건 틀리지 않은 말일 게다. 격식과 외양이 내용을 좌우하기도 하지 않던가. 말도 담는 그릇에 따라 다르다. 

은근하고 점잖은 표현이 그 얼마나 받는 느낌이 다른지 알지 않나? 품위와 정곡을 찌르는 은근한 표현들 말이다. 그러니 껍질은 필요하다.  아주 가서는 안된다. 껍질을 아주 벗겨서는 안된다. 신동엽 시인에게 대드는건 아니다. 

부활절이다. 껍데기는 놓아두고,  알짜로 부활한 하늘에 감사하는 날이다. 한국에선 민초들이 저항했던 날이기도 하다.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누가 19:40)


김화옥  (보스톤코리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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