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46
보스톤코리아  2014-11-04, 14:55:29 
08/22/2014

이덕무는 스스로 자신을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인 ‘간서치看書癡’라고 불렀다. 서얼이지만 왕족의 후손이라 ‘상놈’은 아니고 그렇다고 적손의 양반들과 같이 출사도 못하니, 하는 일이라고는 오로지 독서하는 것만이 천직이라 생각하고 책만 읽었다. 그는 수 만권의 책을 읽었으며 수백권의 책을 필사하였다. 그의 지적 박학다식은 실로 다양하고 방대하였다. 가히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로 종류나 내용에 관계없이 두루 섭렵하였다. 하지만 그는 소설이나 외설스러운 글은 가까이 하지 않았다. 다만 이덕무는 책을 벗하여 천리를 내다 봤고 독서를 통하여 터득한 지식으로 고증과 박학의 대가로 인정 받았다. 그는 왕손이지만 서얼인 관계로 과거도 보지 못하고 관직에도 크게 등용되지 못했다. 그는 제2대 임금인 정종의 후궁 숙의 기씨의 4남인 무림군茂林君 이선생李善生의 10대손이다. 이덕무 역시 정조가 즉위한 후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했다.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등용되어 도서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는 박제가, 유등공, 서이수와 함께 4검서관으로 그 이름을 빛냈으며, 무예도보통지를 비롯하여 국조보감, 갱장록, 대전통편, 규장전운 등의 책들을 임금의 명으로 편찬하였고, 개인적으로는 관독일기觀讀日記를 비롯한 다량의 책을 저술하였다. 그의 수 많은 개인 저술들은 아들 이광규에 의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로 집성되었다. 천장관은 이덕무의 호이다. 그는 이 외에도 형암炯庵, 아정雅亭 등의 호를 썼다. 

그는 박제가와 둘도 없는 벗이었다. 1741년에 태어났으니 박제가보다 9살이나 연상이다. 하지만 나이에 관계없이 평생지기로 교분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둘다 서얼이라는 공통점과 북학에 관하여 공통관심사가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또한 서로의 성격이 판이하기에 상호 충돌없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줬기 때문이다. 박제가는 대단히 직설적이고 극단적인 언행을 하였지만, 이덕무는 마르고 큰 키에도 단아한 모습의 외모처럼 정신을 흩뜨리지 않고 일거수의 행동거지에 일정한 법도가 있었다. 박제가는 현실 개혁을 적극 주장하였다. 정치 뿐만이 아니라 경제와 사회 그리고 문화 등 전분야의 혁신을 주장했다. 그는 전통이란 이름의 고루한 습속과 편견과 아집에 갇힌 의식를 벗어 던져야 한다고 직언을 했으며, 물질적으로도 풍요롭고 정신적으로 윤택한 문화생활을 하기 위한 변혁은 이상세계로의 도약이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이덕무는 사소한 예절과 품행을 중시하였고 도의에 어긋나는 작은 태도를 경계하였다. 즉 정치나 경제, 사회적인 대의에 관하여서 자신의 의견을 전혀 말하지 않고 수신에 열중하는 고지식하고 소심한 선비였다. 박제가와 이덕무는 둘다 많은 책을 읽었다. 그들 중  박제가는 경서 뿐만 아니라 잡다한 소설도 읽었지만 이덕무는 경서 위주의 독서를 하였다. 글 쓰기 역시 관찬서官纂書를 제외한 사문집들은 판이하게 성향이 다르다. 박제가는 현실개혁을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내고 타인을 설득하려고 주장했지만 이덕무는 시, 기記, 서序와 서간문을 제외하면 짧은 글들이 그의 내향적인 성격을 잘 나타내며 또한 아포리즘적인68) 글이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서로가 상반되는 글을 쓴것 같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지나간 시대에서 쓴 글의 스타일을 답습하기를 거부하였다. 내용면에 있어서 이미 알려진 글을, 또는 그 세계를 반복하기 보다는 자신만의 개성이 살아 있는 글을 쓰고자 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형이상학적의 관념세계보다는 자연의 미묘한 움직임과 그 속에서 살아 숨쉬는 작은 생물체나 그들의 세계를 표현하는데 더 관심이 있었다. 결국 그들은 백성들의 생활과 밀접하고 피부에 와 닿는 글을 쓰면서 소위 소품체의 글을 재생산하였다. 즉 이 ‘문장의 도’를 떠나 글 쓰기를 한 방식은 당시 정조 시대에 다른 학자들로 부터도 시도되고 있었다. 고문의 격식과 문체를 따라야만 한다는 고정관념과 절대원칙을 변화시킨 그들은 당시 18세기 후반을 대표한 문학가들이다.

이덕무는 1793년, 52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그러자 그의 재능을 아끼던 정조가 내탕금69)으로 장례비용을 주었으며, 3년 후에는 또 오백 냥을 하사하여 그의 문집 ‘아정유고雅亭遺稿’ 8권4책을 간행하게 하였다. 아정은 그의 호 중의 하나이며, 규장각에서 무예도보통지 등 많은 관찬서를 편찬 및 교감할 때 ‘성시전도城市全圖’70)를 보고 읊은 백운시百韻詩가 정조로부터 ‘아雅’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호를 새로이 아정雅亭이라고 하였다.            

68) 아포리즘(Aphorism – 깊은 진리를 간결하며 압축된 형식으로 표현한 짧은 글. 금언, 격언, 잠언, 경구 등을 말한다.)

69) 내탕금 – 내탕전內帑錢이라고도 하며 임금의 개인 돈을 말한다. 

70) 한양도성의 지도.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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