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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의 뿌리(17)>
보스톤코리아  2014-11-05, 11:30:14   
흉노 휴저왕과 김일제, 김륜 가계도
흉노 휴저왕과 김일제, 김륜 가계도
2014-10-17

노비에서 보정대신이 된 김일제(金日磾) 이야기

김일제의 자는 옹숙(翁叔)으로 흉노 휴저왕(休屠王)의 태자였다. 

BC120년 한나라 표기장군 곽거병이 두 번에 걸쳐 휴저왕을 공격하여 첫 번 공격에서 흉노인 9천900명을 사살하고 제천금인(祭天金人)을 빼앗았다. 제천금인은 흉노족이 하늘에 제사 지낼 때 기도 드리는 금으로 만든 사람 모양 신상이다.

두 번째 공격 때는 흉노의 본거지인 기련산까지 들어가 휴저왕을 비롯하여 3만명을 사살하고, 휴저왕의 왕비 알지와 두 아들 일제와 윤(倫)을 포로로 잡았다. 이 때 김일제는 겨우 14살의 어린 나이였다. 

일제는 하루아침에 일국의 왕자에서 한나라 궁정에서 말을 키우는 노비로 전락하였다. 일제가 황궁에서 말을 돌본 지 수년이 지났을 때 후궁에서 연희를 즐기던 한무제가 들뜬 기분에 황궁에서 키우고 있던 말을 보겠다고 하였다. 말을 기른 노비들이 각자 키운 말을 이끌고 한무제와 비빈들 앞을 지나가는 사열을 하게 된 것이다. 한무제 곁에는 화려하게 치장한 비빈과 궁녀들이 빼곡히 서있었다. 

말을 키우던 노비들은 말을 끌고 지나가면서 비빈과 궁녀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훔쳐 보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김일제는 비빈들에게 곁눈조차 주지 않고 앞만 보고 한무제 앞을 지나갔으니 김일제의 기품 있는 모습에 한무제의 눈길이 가게 되었다. 

비빈들 중에는 김일제의 아버지 휴저왕의 비빈들도 있었기 때문에 김일제로서는 포로의 몸으로 그들을 쳐다보기가 어려웠던 것이었다. 한무제는 김일제가 흉노 휴저왕의 왕자였다는 말을 듣고는 그 자리에서 황실 말을 책임지는 마감으로 임명하였다. 

김일제의 아버지가 금으로 만든 제천금인(祭天金人)으로 하늘에 제사 지냈기 때문에 일제에게 김씨 성을 사성하였다. 이로써 김일제는 세계 최초의 김씨가 된 것이다. 이후에 김일제는 시중, 부마도위, 광록대부로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였다. 

김일제는 노예의 신분에서 재상으로 극적인 신분상승을 하게 된 것은 김일제의 충직하고 성실한 성격이 한무제에게 크게 어필한 것이었다. 

하지만 김일제의 벼슬이 높아짐에 따라 한나라 조정은 물론이고 재야에서도 김일제에 대한 불만과 시기심도 높아지고 있었다. “황제께서 어찌 저런 오랑캐 놈을 귀하게 쓰신단 말인가”라는 말이 돌고 있었다.

바로 이 시기에 한나라 황실 안에서 커다란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한무제는 29세가 되던 해에 위청 대장군의 누이 위황후에게서 아들 유거(劉據)를 낳았다. 유거는 자라나면서 살육을 좋아하는 한무제와는 달리 인자하고 관대하며 부지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무제는 원만한 성격을 지닌 유거를 총애하여 일찍이 그를 태자로 삼아 조정의 대소사를 맡기곤 하였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황실의 재정을 맡고 있던 수형도위 강충(江充)이라는 신하가 무제와 태자를 이간질하기를 자주하였다. 이는 강충의 못된 행실을 태자가 일찍부터 알아차리고 강충을 미워했기 때문이었다. 

한무제는 처음에는 강충의 이간질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자주 강충으로부터 태자의 허물을 듣게 되자 그 역시 태자를 의심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군사를 내어 태자와 그의 두 아들, 태자비와 태자의 며느리까지 사살하였으니 후세인들이 이를 무고의난(巫蠱之難)이라고 부른다. 태자 유거의 가족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은 손자 유순(劉恂)뿐이었다. 

시중복사 망하라와 강충은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강충은 태자를 모함했고 망하라의 동생 망통은 태자를 죽인 공(?)을 세워 출세하게 되었다. 하지만 훗날에 태자가 강충의 무고로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알려지면서 한무제는 강충 일족과 그 일당을 모두 없애버렸다. 

강충과 절친했고 직접 태자를 죽인 망하라, 망통, 망안성 형제는 언젠가는 자신들도 강충처럼 멸문지화를 당하게 될 것이 두려워 아예 한무제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한무제를 수행하던 김일제는 망하라 형제들의 행동이 수상해서 밤낮없이 무제의 곁을 지켰다.

BC88년 한무제가 임광궁(林光宮)에 행차했을 때 망하라가 새벽녘에 칼을 숨기고 무제의 침실로 돌진하자 김일제가 그를 끌어안고 소리쳤다. “망하라가 반란을 일으켰다.” 소란 중에 한무제도 깨어났고, 호위병들이 서로 붙잡고 뒹굴고 있는 망하라와 김일제를 향해 활을 쏘려고 하자 한무제는 김일제가 다칠까 활을 못 쏘게 하였다. 결국 망하라는 체포되었고 망하라 형제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이 사건으로 한나라 조정 내외에 있었던 김일제에 대한 시기와 불만을 잠재우고 김일제의 위상이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BC87년 71세의 한무제가 세상을 떠나면서 김일제와 곽광, 상관걸, 상홍양 네 명에게 당시 8살 밖에 안된 어린 소제(昭帝)의 후사를 부탁하면서 김일제를 투후(秺侯)로 봉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으나 일제는 소제가 어리므로 봉을 받지 않았다. 한무제가 죽은 뒤 1년 후에 일제가 앓아 눕게 되고 병이 깊어졌다. 대장군 곽광이 임금에게 진언하여 일제가 투후의 인수를 받게 되었으니 투후는 자손대대로 제후의 벼슬을 물려줄 수 있는 대단한 벼슬이었다. 투후의 영지는 지금 산동성 하택시 성무현 옥화묘천으로 이 지방 사람들은 투성이라는 공식 이름대신 금성(金城)이라 부르고 있다. 흉노 사람들은 왕이 살고 있는 도성을 금성(金城)이라고 부른다. 일찍이 신라 사람들이 도성 경주를 금성이라고 호칭한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김일제는 투후 인수를 받고 하루가 지나서(50세?) 사망했다. 그의 장례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국가에서 부담하고 경차와 무장병을 딸려 장송하니 장례 행렬이 한무제의 무덤이 있는 무릉에 이르렀다. 김일제는 위청, 곽거병과 함께 한무제의 배장묘에 묻히게 되었다. 그에게 또 다시 경후(敬侯)라는 시호가 추존되었다.

김일제에게 내려진 투후라는 벼슬 이름이 신라 30대 문무왕 비문에 신라 김씨의 시조로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을 독자들에게 상기하고자 한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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