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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의 뿌리(18)>
보스톤코리아  2014-11-05, 13:02:42   
김해 김수로왕 납릉
김해 김수로왕 납릉
2014-10-24

김씨와 허씨 연합하여 곽씨의 전횡을 물리치다

곽광(霍光)은 표기장군 곽거병의 배다른 동생으로 하동군 평양현(지금 산서성 임분) 사람이다. 일찍이 그의 아버지 곽중유는 현리 신분으로 한무제의 매부 평양후 집에서 잡일을 거들고 있었다. 그는 평양후 집의 시녀 위소아와 정을 통해 곽거병을 낳았지만 현리 임가를 마치자 하동군으로 돌아가 새 장가를 들어 곽광을 낳았다. 곽거병은 자신의 생부가 곽중유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어느 날 흉노로 출정하는 길에 하동군을 지나게 되자 곽중유에게 사람을 보내 그 아비를 비로서 만나게 뵈었고, 아비를 위해 많은 땅과 집, 노비를 사주고 떠났다. 그리고 회군하는 길에 10살 된 이복동생 곽광을 데리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곽광은 10살의 어린 나이 때부터 한무제를 모시기 시작했는데 20여년 동안 실수가 없어 무제에게 각별한 신임을 받고 중용되었다. 곽광은 침착하고 냉정하며 매사에 신중한 사람이었다. 

한무제 말년 치세 때는 김일제와 더불어 한나라 조정의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BC 87년 한무제가 중병이 들어 죽기 직전에 그는 곽광, 김일제, 상관걸, 상홍양 네 사람을 불러 자신의 뒤를 이을 8세 밖에 안된 어린 태자 유불릉(효소제: 孝昭帝)의 후사를 부탁하며 곽광을 대사마 대장군, 김일제를 거기장군, 상관걸을 좌장군, 상홍양을 어사대부로 임명하고 그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 

네 명의 고굉대신 중 김일제는 한무제가 죽은 지 1년 후에 세상을 떠났고, 상관걸, 상홍양은 곽광을 제거하려고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모두 처형되었다. 권력을 나누어 받았던 4명 중 3명이 사라지자 천하의 권력이 모두 곽광과 곽씨 문중으로 쏠리게 되었다. 

BC74년 소제(昭帝)가 21세의 나이로 병사하자 대를 이을 후손이 없어서 한무제의 손자 창읍왕 유하가 후사를 잇게 되었다.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데 유하는 떡잎이 되기도 전에 말썽부리는 것이 줄을 이었다. 

황제로 즉위하려고 창읍에서 장안으로 오는 중에도 수레에 여자를 감추어 실었고, 소제(昭帝) 장례 때도 곡을 할 때 목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불성실하였을 뿐더러 그가 데려온 200여명 수종들의 행패 역시 도가 지나쳤다. 창읍왕은 즉위한 지 27일만에 곽광이 앞장서서 폐위시켰다. 

이제 누구에게 제위를 계승시키는 것이 힘들었는데 당시 황족 근친들은 죽거나 죄를 지어서 줄줄이 축출당했기 때문에 적절한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다. 

당시 광록대부로 있던 병길(丙吉)이 한무제의 증손 유병이(劉病已)를 추천하였다. 유병이는 원래 한무제의 태자 유거(劉據)의 손자였다. 강충과 망하라 형제들이 결탁하여 무고의 난을 일으켜 유거와 그의 식구들이 모두 살해당했고 유병이는 태어난 지 몇 달밖에 안되었지만 강보에 쌓인 채 감옥에 갇혀버렸다. 

마침 감옥을 관리하고 있던 정위감 병길(丙吉)은 태자 유거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알고 황증손 유병이의 처지를 매우 동정하였다. 여자 죄수 두 명을 골라, 돌아가며 황증손에게 젖을 먹이게 해주었다. 황증손은 갖가지 위험한 상황들을 겪으면서 매우 허약했고 여러 차례 중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곤 하였다. 병길은 자신의 돈으로 황증손에게 음식과 옷, 약을 대주고 매일같이 찾아가 돌봐주었다. 

한나라 왕통 계보
한나라 왕통 계보
 

여러 해가 지나고 황증손이 감옥에 있게 되고 아직 이름도 없자 병길은 황증손의 병이 다 나았다는 의미로 유병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BC87년 한무제는 죽기 직전에 유병이의 상황을 보고받고 깨닫는 바가 있었다. 

천하에 대사령을 내리고 유병이를 석방시켰다. 병길은 유병이를 그의 외할머니 정군(貞君)과 외삼촌 사공(史恭)에게 데려다 주었다. 얼마 후 무제는 황증손 유병이를 액정(掖庭)에 머물게 하고 조정에서 생활비를 대도록 하였다. 액정은 후궁과 비빈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환관이 관리하고 있었다. 당시 액정령이던 장하(張賀)는 다행히도 과거에 태자 유거를 모시던 사람으로 태자의 은덕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사비를 들여 황증손에게 시경, 논어, 효경을 가르쳐 성취가 있게 되었다. 황증손이 결혼할 나이가 되자 장하는 사방으로 신붓감을 찾았지만 명문세가에서는 이미 몰락하고 기대할 바 없는 황증손에게 딸을 주려 하지 않았다. 

마침 장하의 환관 동료 중에 허광한(許廣漢)이라는 환관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허평군(許平君)이라는 예쁜 딸이 있었다. 장하가 허광한을 청해 주연을 베풀고 황증손과 허평군을 짝 지을 것을 제의하니 허광한이 승락하여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다. 

BC74년에 황증손이 병길의 추천으로 예상치 못하던 황제가 되자 그는 이름을 유순(劉詢)으로 바꾸고 즉위하니 한나라 9대 효선제(孝宣帝)로 한나라를 중흥시킨 명군이었다. 

선제는 황제로 즉위하면서 조강지처인 허평군을 황후로 책봉하려 했지만 대신들은 선제가 즉위하는데 공이 컸던 곽광의 딸 곽성군(霍成君)을 황후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다. 하지만 선제는 외척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의식해서 대신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조강지처 허평군을 황후로 책봉하고, 둘 사이에 태어난 유석(후일의 원제: 元帝)을 태자로 봉했다.
선제는 즉위해서 BC68년 실권자 곽광이 병사할 때까지 5년 동안 이름만 황제였지 모든 실권은 대장군 곽광의 손에 있었다. 선제는 측근 세력이 없었으므로 곽광의 명을 따라야만 황제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곽광의 처 현아(顯兒)는 마침 임신 중이던 황후 허평군이 병이 걸린 기회를 틈타 여의(女醫) 순우연(淳于衍)을 매수해서 허평군을 독살해버렸다. 허평군의 뒤를 이어 현아의 딸 곽성군이 황후가 된 것은 물론이다. 

BC68년 세도 대신 곽광이 병사했지만 곽씨들의 전횡은 그대로 계속되었다. 효선제는 조정 대신 위상(魏相)과 독살로 사망한 허평군의 아버지 허광한(許廣漢), 김일제의 동생 김륜(金倫)의 아들 도성후(都成侯) 김안상(金安相)을 중용하고 곽씨들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허광한, 김안상이 허황후 독살의 주범이 곽광의 처 현아의 소행이라는 것을 밝히면서 현아는 죽임을 당하고 곽성군은 황후 자리에서 쫓겨났다가 자살하였다. 곽씨 일파가 제거되고 조정의 실권은 김씨와 허씨에게 쏠리게 된다. 

사학자 문정창 씨는 김안상의 4대손 김탕(金湯)이 후한 광무제의 보복을 피해 김해로 도피하여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 왕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김수로 왕의 왕비 허황옥의 출자가 허광한 집안이었다는 것을 아주 쉽게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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