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와 홍국영洪國榮(3)
보스톤코리아  2014-11-05, 13:09:13 
2014-10-03

 1776년,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 해, 한반도에 자리한 조선도 문무를 부흥시킨 현명한 군주 정조가 3월에 즉위를 하였다. 정조와 함께 정조의 시대를 연 당대의 풍운아 홍국영, 그는 미남이었고 비상한 재능과 함께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담력도 소유했으며, 눈앞에 닥친 위기를 지혜롭게 모면하는 기지奇智도 있었다. 

 때로는 지나친 자신감이 교만과 독단으로 비춰지기도 하였지만 그의 지략과 통솔력은 국왕을 보좌하여 한 시대를 여는데 손색이 없었다. 원래의 성격이 잔인하고 보복성이 있어서 정적은 많았지만 정조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3,4년간 그의 권력은 왕권에 버금하였다. 홍국영은 도승지(현재의 비서실장 격)가 되어서 왕명을 출납하면서 정조의 신변을 직접 보호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숙위소宿衛所를 설치하였다. 

 숙위소는 1777년(정조1년)에 왕을 호위하기 위하여 임시로 설치한 관청이다. 대전大殿을 숙위하는 금군禁軍들의 신변숙위 실수를 염려하여 설치하였으며 홍국영이 숙위대장이 되어 궐내는 물론 궐외의 3영(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입직, 순라 등의 교대 및 모든 군사활동을 숙위소로 서면 보고하도록 하였으며 이 숙위소에서 모든 명령 또한 하달되었다. 숙위소는 호위와 순검의 모든 부서의 총상황본부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홍국영은 결국 문무의 전권을 휘둘렀고 그가 누린 막강한 권력은 만조백관들을 맹종케 했다. 모든 공무와 왕명을 총람했던 이 숙위소도 1780년 홍국영이 대역죄로 폐출될 때 함께 혁파되었다.

 승승장구 할 것만 같았던 홍국영의 세도도 달이 차면 기우는 것처럼 기반이 허물어 지고 있었다. 자신의 세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하여 후궁으로 들인 누이가 오히려 그의 정치 생명을 단축시켰다. 그의 누이동생은 정조와 가례를 올린지 1년도 되지 않아 갑자기 사망하였다. 그리고 홍국영은 누이동생 원빈이 독살되었다고 의심하였으며 그 배후가 정비 효의왕후라고 믿었다. 동시에 외척의 발로를 염려했던 정조는 원빈 사망 후 홍국영을 은퇴시켰다. 정조는 세손 시절 부터 보아온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외척인 경주 김씨와 자신의 외가인 풍산 홍씨들의 발로가 정국을 혼미하게 몰면서 그 권력의 암투 속에서 생부 사도세가가 비명에 횡사했기에 그의 통치 원칙은 외척이 정치에 간여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홍국영과 새 시대를 열었지만 홍국영 역시 외척이 되면서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단 격이 되어가니 그를 일찍히 은퇴시켜서 ‘봉조하’에 임명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은 왕위 계승에 개입하여 간섭했기 때문이다. 그의 누이동생은 ‘원빈’으로 봉해졌는데 이 ‘원元’은 ‘으뜸 원’으로 왕통의 근본으로만 쓰였기에 후궁이 쓸 수가 없는데도 홍국영의 입김으로 택해진 작호이다. 그리고 홍국영은 원빈이 죽고, 효의왕후가 후사를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完豊君으로 봉하였다. 여기서 완은 ‘전주 이씨’를 뜻하고, 풍은 ‘풍산 홍씨’를 의미한다. 왕실에서는 어머니쪽 관향을 작호로 쓰지 않았는데 이것 또한 전래가 없었던 것으로 홍국영의 의중에는 완풍군을 정조의 후계자로 심중에 두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벽제역 괴서사건’과 젊은 홍국영이 자신의 지위와 정조의 신임만을 믿고 원로 대신들에게 무례하게 대하면서 절대 권력을 유지하려다가 반대파는 물론이거니와 동료들 마저도 그의 인간적인 도덕성에 모멸감을 느끼면서 그를 떠나게 되었다. 

 드디어 1779년(정조3년) 9월 26일, 정조와 홍국영이 7년 전 처음 만난 날(영조 48년, 1772년), 홍국영은 정조 앞에 무릅을 꿇고 “신이 한 번 대궐문을 나가서 다시 세상에 뜻을 둔다면…중략… 하늘의 신神이 반드시 죄를 줄 것입니다” 라는 내용의 사직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정조는 즉석에서 사직을 받아드리면서 “이전과 이후 천년에 걸쳐 이와 같은 군주와 신하의 만남이 언제 있었고 언제 또 다시 있을 수 있겠는가, 옛날 부터 흑발의 재상은 있었지만 흑발의 봉조하는 없었는데, 드디어 흑발의 봉조하도 있게 되었다” 라고 말하면서 그를 봉조하에 봉했다. 

 그는 모든 직책에서는 사직을 했지만 ‘흑두봉조하’로서 궁궐을 출입하고, 그의 은퇴와 동시에 백부 홍낙순이 정승에 임명되면서 나름의 세력을 유지하면서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홍국영의 당여들이 서명응을 탄핵하려다가 역풍을 맞고 홍낙순 마저 1780년 1월에 축출 당하고 나자 김종수의 탄핵상소를 시작으로 홍국영에 대한 탄핵이 빗발쳤다(한중록에서는 이 김종수의 상소가 정조의 뜻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홍국영은 모든 재산을 몰수 당하고 방출되어 강원도 횡성을 거쳐 강릉으로 가서 산과 바다를 헤메면서 통곡하다가 이듬 해 1781년 34세의 나이로 죽었다. 정조가 그를 방출한 이유는 그가 새로운 세대를 이끌어 갈 경륜과 지혜가 없는 인물이었고 구세대의 인물처럼 독점적이고 특권적 권력을 누리려고만 했으며 도덕성 마저 파탄나면서 정조를 실망시켰기 때문이라 본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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