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 정벌의 공신 이광, 위청
보스톤코리아  2014-11-05, 14:01:57 
중국 섬서성 함양 부근 무릉(한무제묘)에 배장(陪葬)되어있는  위청 묘 (섬서성 흥평현 남위향 도상촌)
중국 섬서성 함양 부근 무릉(한무제묘)에 배장(陪葬)되어있는 위청 묘 (섬서성 흥평현 남위향 도상촌)
2014-10-03

 한무제 치세 52년간에 40년은 매년 흉노와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다. 

 이런 난세에는 걸출한 영웅이 나타나게 되어있다. 여러 명의 장수들 중에서 특별히 뛰어난 세 사람이 있었으니 이들에 대한 기록이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반고의 한서(漢書)에 기록되어 있다. 이광(李廣),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이 바로 이들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들 세 사람의 성격이나 행동이 너무도 상이한데도 불구하고 흉노를 물리치는 데는 도가 튼 사람들이었다. 곽거병의 용병술은 전광석화 같았고, 의표를 찌르는 기습이 많았다. 때로는 병법에는 어긋나지만 결국에는 승리하는 상승장군으로 한무제로부터 제일 큰 총애를 받았다. 

 곽거병은 태어났을 때부터 주위 사람들이 떠받들어 주어서 성격이 오만하고 행동에 거리끼는 바가 없었다. 그는 일반 병사들의 심정이나 고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 

 한무제가 수레에 음식을 가득 실어 보냈는데 그가 먹고 남으니까 그냥 버려버렸다. 그때 그의 병사들은 굶주리고 있었다. 그에 반해 어린 시절부터 고생을 많이 해온 위청은 아랫사람들은 돌볼 줄 알았고 사람됨이 어질었다. 사마천은 위청을 평하기를 “대장군은 사람됨이 어질고, 선하고 겸손하다.” 그러나 “온화하고 부드러움으로 천자에게 아첨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칭찬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단점을 말했다. 

 위청의 용병은 충분히 준비하고 적의 허실을 관찰하다 공격하는 스타일로 실수가 적은 상승장군이었다. 곽거병의 화려한 승리 뒤에는 언제나 든든한 위청의 도움이 있었다. 
세 사람의 장군 중 흉노족들이 제일 무서워한 장군은 비장군 이광이었다. 


 <이광(李廣)>
 이광은 진시황 때 명장, 이신의 후손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활 쏘는 법을 전수해왔는데 이광은 그 중에서도 특출한 궁수였다. 한문제 14년(BC 166)에 흉노족이 대거 침입해 왔을 때 이광은 일반 병사의 신분으로 출정했는데 신기에 가까운 궁술로 가장 많은 적을 사살하여 장군의 직위를 받았다. 

 이광은 궁술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용기와 기지를 겸비한 장군이었다. 흉노족들은 그가 온다는 소문만 듣고도 철군했기 때문에 한나라 황제들은 흉노가 쳐들어오면 의례 그를 출전시키었다. 

 한번은 이광이 100명의 기마병을 이끌고 3명의 흉노족을 추격하여 사살한 일이 있었다. 이때 갑자기 수 천명의 흉노 기마병이 나타나자 병사들이 도망가려 했지만 이광은 “지금 우리 본대는 몇 십리나 떨어져 있는데 지금 도망친다면 저들이 추격해서 모두 죽게 된다. 만약 우리가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저들은 우리가 유인하려는 것으로 알고 함부로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일부러 안장을 풀고 말에서 내려 휴식을 취하였다. 

 예상대로 수 천의 흉노 기병들은 100명의 한나라 기병들을 공격하지 못하다가 밤중에 퇴각하였다. 이처럼 이광은 용기 있고 기지가 대단한 장군이었다. 군사들을 불편하지 않게 하였으니 그의 병사들은 이광을 추앙해 전투에 임해서는 사력을 다하였다. 흉노와 70여번을 싸워 숱한 전공을 세웠지만 위청이나 곽거병처럼 대승을 거두지 못하였고 다른 장군들처럼 제후의 반열에도 오르지 못하였다.

 60세가 되던 해에 위청, 곽거병과 함께 흉노를 치게 되었는데 이광의 군대가 작전 중에 길을 잃게 되었다. 전쟁에서 길을 잃는 것은 군법에 따르면 중죄에 해당되었다. 
위청은 이광을 불러 죄를 묻게 되었다. 상관으로서 응당 취해야 할 절차를 취한 것이다. 이광은 자신의 죄과에 대한 심문과 질책을 당하고 싶지 않아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흉노, 한, 대월지 지도. 위청 장군 진격로
흉노, 한, 대월지 지도. 위청 장군 진격로
 

 <대장군 위청(衛靑)>
 위청은 노예의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후일에 대장군이 되어 흉노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한나라 중흥의 일등 공신이 되었다.

 인생의 황금기에 한무제로부터 버림받고 실의 속에 생을 마감한 다음에는 온 일가가 멸문지화를 당하였다. 

 위청의 아버지 정계(鄭季)는 미천한 출신으로 한무제의 매부인 평양후(平陽侯) 조수의 집에서 급사로 일했다. 그 집의 하녀 위온(衛媼)과 사통하여 청(靑)을 낳­았다. 위청을 낳기 전에 위온은 이미 위유, 위자부라는 두 딸과 위보, 위광이라는 아들을 두고 있었는데 어미의 성을 따르는 것으로 보아 아비들의 신원이 확실치 않은 듯하다. 위청의 이름도 사실은 정청(鄭靑)이 맞는 이름이었다. 

 사생아, 노예의 신분으로 태어난 위청은 어린 시절에 생부 정계에게 돌아갔는데 위청이 하는 일은 하루 종일 양(羊) 치는 일을 하였다. 

 생부의 배다른 형제들은 그를 종으로 부리고 형제 대우를 하지 않았다. 

 한번은 우연히 감천궁(甘泉宮) 감옥을 구경하게 되었는데 죄수 중 한 명이 위청을 한눈에 보고 “이 아이는 귀인이다. 후에 크게 될 것이다”라고 하자 위청은 “남의 종으로 태어났습니다 매질과 욕설을 안 당하면 다행인데 어찌 벼슬 자리를 바라겠습니까”라며 겸양하였다. 

 위청은 나이가 들자 다시 평양후 집으로 가서 평양공주의 말몰이꾼이 되었다. 

 당시 한무제와 황후 진아교(陣阿橋) 사이에는 소생이 없었다. 그래서 한무제의 어머니 왕부인과 누이 평양공주는 계속 다른 여자들을 소개했지만 효과가 없었고 진아교는 나름대로 질투심만 커져서 한무제와의 관계도 소원해지게 되었다. 

 한무제는 심심하면 평양공주 집에 들렸는데 마침 노래 부르는 가기 위자부(衛子夫)와 눈이 맞아 아들을 낳게 되었다. 위자부는 위청의 동모이부(同母異父) 누이였다. 위자부가 황자를 낳고 궁궐에 들게 되자 덩달아서 위청도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위자부가 낳은 황자 유거는 천성이 어질고 학문에 정진하여 후일에 태자가 되지만 강충이라는 간신이 한무제와 황태자 유거를 이간질하여 유거는 젊은 나이에 한무제로부터 죽음을 당하게 되어 위황후는 폐위되고 위씨 일가는 멸문지화를 당하게 된다. 

 BC129년 위청, 공손오, 공손하, 이광이 각각 1만명을 거느리고 흉노를 쳐들어갔는데 예상을 뒤엎고 기대도 안 했던 위청만이 승전하고, 상승장군 이광은 포로로 잡혔다가 간신히 도망쳐 나왔다. 위청의 승리로 한나라 군사들은 흉노와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2년 후에 흉노가 요서 지방을 침공했을 때 위청은 운중 고궐, 농서까지 진격해서 흉노의 백양왕과 누번왕을 물리치고 이곳에 삭방군(朔方郡)을 설치하였다. 

 BC130년부터 BC119년까지 10여년동안 위청은 흉노를 7차례나 원정하여 항상 승리하고 큰 공을 세워 대장군이 되었다. 당시에 한무제의 누이 평양공주가 평양후 조수와 이혼하고 홀로 되어 재혼 상대자를 물색하고 있었다. 주위에서 대장군 위청을 천거하자 평양공주가 억색해 하면서 “예전에 자신의 말몰이꾼이었는데 어찌 낭군이 될 수 있겠는가?”하자 “지금 한나라에는 황제를 빼고 그보다 더 높은 사람이 없다”고 하며 재차 권유하자 평양공주가 납득하고 위청의 부인이 되었다. 예전의 천민으로 자신의 말몰이꾼이었지만 이제는 한 이불을 덮고 자게 되었으니 사람팔자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BC119년에 한무제는 위청과 곽거병에게 각각 5만명의 군사를 주어 흉노선우를 공격하게 하였다. 위청이 흉노 선우를 대패시켰지만 선우는 가까스로 탈출하였다. 그래서 위청은 대승을 하고도 전공에서 삭제되고 대장군의 지위도 한무제의 처남 이광리에게 물려주었다. 이때 위청의 누이 위황후는 황제의 총애를 잃고 있었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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