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48
보스톤코리아  2014-11-05, 14:11:27 
2014-09-19

정조와 홍국영洪國榮(1)

정조시대의 풍운아 홍국영은 누구인가? 그를 기록한 정사를 비롯하여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과 당시와 후대의 야사를 보면 홍국영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거의가 그가 죽은 뒤 기록된 관계로 부정적으로 혹평되거나 비하된 부분이 상당히 많다. 여기서는 그에 관한 기록들 중에서 중첩되면서 나타나는 부분을 객관적으로 서술해 본다. 그는 풍운아임에는 틀림이 없다. 1776년 정조 즉위와 함께 실권을 잡으면서 3, 4년의 짧은 기간에 막강한 ‘세도勢道’을 부리다가 3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지만 그가 끼친 당대의 영향은 지대하다. 그 여파로 인하여 20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그의 발자취는 역사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으며 그에 대한 평가 역시 현재진행형으로 학술논문과 소설을 비롯한 다양한 매개체를 통하여 각색되어 가고 있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서울의 장안에서 뿌리를 내린 명문 문벌 중의 하나였다. 즉 도성의 ‘경화사족 집단’의 일문이었다. 그는 풍산豊山 홍씨인데, 풍산 홍씨의 비조격인 홍이상이 그의 8대조이며, 그의 6대조 홍주원이 선조 임금의 적녀 정명공주(인목대비의 딸, 영창대군의 누이)의 남편인 부마 영안위이다. 그리고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 또한 이 홍주원의 후손이다. 고로 홍국영의 아버지 홍낙춘이 혜경궁 홍씨와 10촌간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가문은 영조 당대에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를 비롯하여 이익보 가문, 홍계능 가문, 조중회 가문, 김이도 가문 등 세력가들과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 홍국영의 조부 홍창한은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고 백부, 숙부 모두 ‘출세’를 했지만 그의 부친 홍낙춘은 백면서생으로 지냈다.75) 이런 가문과 집안 분위기 속에서 자란 홍국영의 젊은 시절, 즉 과거에 급제(25세 때인 1771년 정시 문과)하기 전의 기록은 눈치가 빠르고 민첩하였으며 시문을 잘 짓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 미남 젊은이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에 한중록에는 그의 평가가 상당히 인색하다. 혜경궁 홍씨는 홍국영을 대단히 미워했기에 호의적인 기록이 없지만 그 속에서도 홍국영의 진면모를 볼 수 있다. 한중록에 따르면 홍국영은 말이 경망하고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재주도 별로 없으면서 글을 잘한다고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면서 여하튼 글을 능숙하게 지어서 항상 사용하는 시와 문장은 재치있고 예리하였으며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젊은 시절 놀기를 좋아하는 한량배였다. 그는 늘 “천하의 모든 일이 내 손아귀에 있게 되리라” 라고 떠버렸기에 동료들로 부터 과대망상자로 따돌림을 받았고 동료들은 그를 이해하질 못했다. 한중록에는 그가 하늘도 땅도 두려워 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했다. 또한 심낙수沈樂洙의 ‘은파산고恩波散槁’ 에는 홍국영은 경망하고 방종하였으며 술과 여색을 좋아하고 함께 모여 놀거나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고 전한다. 즉 시중의 무뢰배들과 어울려 술과 여색으로 창을 부르고 장기를 두며 놀았다고 한다. 이렇게 과거에 급제하기 전까지는 호방하게 막 놀기만 한 한량이었지만 그는 25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영조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다. 영조가 홍국영을 곁에두고 사관으로 부리면서 ‘내 손자다’라고 까지 부를 정도로 귀여워 했다. 그리고 그는 왕위계승권자인 세손(정조)의 보좌역을 맡은면서 출세의 가도를 달린다. 이 보직은 영조의 귀여움도 있었지만 당시 막후세력의 두 가문인 풍산 홍씨와 경주 김씨가 혼인으로 엮어진 인척관계의 가문의 덕이라고 본다.

그리고 정사 역시 그의 실각이나 사후에 수정되어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그를 묘사한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홍국영은 권모술수에 능하여 혼자 힘으로 정치판에 뛰어들어 개혁을 주도했던 뛰어난 인물로 묘사되기도 했고, 또한 그는 백성들과 함께 숨쉬고 생활하며 그들의 애환를 바탕으로 정치를 바르게 하려했던 현실적인 개혁가로도 묘사되어 있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간 개인적으로 품고 있던 불만을 정조의 즉위와 함께 실권을 잡으면서 ‘세도’를 부린 한갖 세도가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평가하고 있다. 

영조 말엽의 정국은 외척들이 정권의 주도권을 서로 잡기 위해 대단히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홍인한76) 과 정후겸77) 의 세력과 김귀주78) 의 세력이 서로가 정권을 주도해야 세손의 안위가 보장된다고 다투고 있었으며, 거기에 홍상간(홍계희의 손자), 민항렬(숙종의 장인인 여흥 민씨 민유중의 가문) 등 신진세력이 홍국영을 멀리하자 세손은 홍국영을 더 좋아하였으며, 외척들이 앙앙불락하는 가운데서도 김귀주를 더 좋아하였다. 이렇게 세손의 신임으 얻어가는 홍국영은 자신의 입지를 넓힐 수 있었다. 

75) ‘한중록’에서는 홍낙춘을 ‘광증이 있다’ 라고 기록하였다. 그의 딸이 정조의 후궁으로 들어간 후에 처음으로 관직에 등용되었다. 판돈녕부사를 지냈다.

76) 홍봉한의 이복동생, 홍봉한은 정조의 장인이다. 

77) 화완옹주의 양자, 화완은 영조와 선희궁 이씨의 소생이며 사도세자의 동생이다. 

78)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오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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