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의 뿌리(13)>
보스톤코리아  2014-11-05, 14:17:58 
감숙성 무위시에 있는 김일제 석상
감숙성 무위시에 있는 김일제 석상
2014-09-19

한무제 흉노를 물리치다

한고조(漢高祖) 유방이 평성에서 흉노 묵특에게 대패하고(BC 200) 흉노와 굴욕적인 화친을 맺었다는 사실을 전번 칼럼에서 밝힌 바 있다. 한고조 유방으로 말하면 막강한 초패왕 항우를 해하 대전에서 물리치고 중국을 통일한 영웅 중의 영웅이었다.

이런 역전의 영웅이 흉노 묵특에게 단 한번의 싸움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그는 장군 진희(陳稀)를 북방 변경으로 보내 군사를 감독하게 했는데 진희는 흉노와 결탁하고 스스로 대왕(代王)이라고 칭하면서 배신을 했고, 연왕 노관은 흉노에게 항복해 버렸다. 

흉노는 화친 조약으로 챙겨갈 것은 모두 챙겨가면서도 수시로 국경을 넘나들며 한나라를 괴롭혔지만 한나라는 막강한 흉노를 대적할 힘이 없어 온건하게 대응할 수 밖에 없었다. 한고조 유방은 속병을 얻어 괴로워하다 결국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였다(BC 195). 유방의 미망인 여태후(呂太后)는 한고조의 뒤를 이어 등극한 혜제와 전소제(前小帝), 후소제(後小帝)를 제쳐두고 섭정이 되어 황제의 역할을 대신 하게 되었다.


흉노, 한 대월지 지도
흉노, 한 대월지 지도
 

 
묵특은 여태후에게 국서를 보내어 “그대는 이제 혼자된 몸이고 나 역시 쓸쓸하니 각자에게 있는 것으로 서로의 없는 것을 채워봄이 어떻겠소” 하며 무례한 요청을 하였다. 그 내용인즉 나도 아내가 없고 당신 역시 남편을 잃었으니 서로 부부의 연을 맺자는 청혼 편지였다. 

한나라 측에서 보면 대단히 무례한 국서였지만 힘이 모자랐기 때문에 여태후는 묵특을 달래는 답서를 보냈다. “저는 이제 늙어서 기력이 쇠하고 머리카락과 이도 다 빠져버렸습니다”라는 글로 개가할 의사가 없다는 뜻을 보냈다.  

그 이후로 혜제, 문제(BC 180~BC157) 때도 공주를 선우에게 시집 보냈다.

흉노는 수시로 한나라를 침범해왔지만 한나라는 흉노와의 싸움을 피하면서 군비와 국력을 키우는 데에 주력할 뿐이었다. 한나라가 흉노에게 패전한 제일 큰 원인은 기병 위주의 흉노에게 한나라는 보병 위주로 싸웠기 때문이었다. 한나라 역대 왕들은 말의 숫자를 늘리려고 말을 많이 키우는 백성들에게 병역을 면제해주었고 군대 편제를 흉노처럼 기병 위주로 바꿨다. 

흉노 사람 훈련관을 초빙하여 군대 훈련을 시켰다. 효문제 이후로는 농업을 장려하려고 세율을 1/15에서 1/30으로 대폭 삭감한 결과로 한나라의 국력이 크게 신장하였다. 

흉노 묵특이 사망한지 30년 후에 한나라에는 묵특에 비견할만한 위대한 황제 한무제(漢武帝)가 즉위하였다. 중국 사람들은 진시황, 한무제와 청나라 때의 강희제를 위대한 제왕으로 꼽고 있다. 한무제가 뽑힌 이유는 흉노를 섬기던 한나라가 그의 치세 때 흉노를 제압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땅에 한사군을 설치해서 우리에게는 껄끄러운 인물이지만 중국을 위해서는 흉노뿐 아니라 월남, 티벳을 정복하고 장건을 시켜 실크로드를 개척한 사람이었다. 

기원전 141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황제가 되서 BC8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54년에 걸친 그의 치세는 흉노 타도가 제일 큰 과제였다. 이 전쟁과 준비 과정에서 한나라 백성들은 반세기라는 긴 세월을 엄청난 고난과 불행을 겪어내야만 했다. 한무제가 흉노를 격퇴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를 믿고 따라준 충직한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즉위할 때(BC 141) 한나라에는 이미 30만필의 전투용 말이 확보되어 있었고 국가 재정이 넉넉하여 전쟁 준비가 갖춰지고 있었다. 


연지의 주 원료인 홍람꽃이 많이 재배되는 연지산의 모습
연지의 주 원료인 홍람꽃이 많이 재배되는 연지산의 모습

그의 재위 중에 능력 있는 인재들이 많이 등용되었는데 그는 종족이나 신분, 귀천을 가리지 않고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다. 예를 들면 흉노를 무찌르는데 수훈을 세운 위청(   靑)과 곽거병(霍去病) 장군은 천민 출신이었다. 

황제가 지켜야 하는 세 가지 책무 천인3책(天人三策)을 제시한 유학의 대가 동중서(董仲舒), 13년간 온갖 어려움과 위험을 겪으며 천산남북, 중앙 아시아, 각지에 그의 족적을 남기고 실크로드의 실체를 밝힌 장건, 문장의 대가 사마상여, 재능 있는 행정가 공선흥, 소신 있는 충언으로 유명한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 삼천갑자 동방삭 등 중국 역사에 그 이름을 떨치고 있는 수많은 인재들이 그를 보좌하고 있었다. 

BC133년 한무제는 드디어 흉노에 대한 대규모 반격을 시작했다. 

두 번의 공격이 성과 없이 끝나자 한나라 군대는 흉노의 주력을 피해 곽거병이 1만명의 병력으로 흉노의 방어가 미약한 서쪽을 공격하였다. 곽거병은 후방 보급 부대도 없이 병사들 각자가 수 일분의 식량만을 지참하고 공격하였다. 흉노군과 싸워서 그들의 식량을 빼앗지 못하면 굶어 죽기 때문에 한나라 군은 목숨을 걸고 싸워 승리하였다. 

곽거병은 흉노 본거지 언지산(焉支山)에 도달한 후 흉노 절란왕과 노후왕을 죽이고 좌현왕 혼야왕(渾耶王)을 포로로 잡고 우현왕 휴저왕을 물리쳤다. 

또한 흉노인들이 하늘에 제사 지내는 제천금인을 빼앗았다. 

이 전쟁으로 곽거병은 1만 병사 중 7천명이 죽고 3천명만 살아남았지만 대단한 전과를 올린 것이다. BC121년에 곽거병은 또 다시 서쪽 흉노를 공격하여 사상자 3만 2천명을 내게 하였다. 

곽거병의 공격으로 흉노의 수뇌부가 동요하게 되었다. 흉노의 대선우가 죄현왕 혼야왕과 우현왕 휴저왕을 패전의 책임을 물어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 양인이 한나라에 투항하기도 했는데 휴저왕이 주저하자 혼야왕이 휴저왕을 죽이고 한나라에 투항해버렸다. 

휴저왕의 부인 알지(閼氏)와 아들 김일제(金日磾), 김윤(金倫)은 한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이곳 기련산(祁連山) 일대는 흉노의 대단위 목장이 있던 곳이었고 그 지맥인 언지산(焉支山)은 서역과 연결되는 실크로드가 시작되는 요충지였다. 언지산에서는 여인들이 얼굴에 바르는 연지의 주원료인 홍람이 많이 재배되는 곳이라서 연지산으로 고쳐 부르기도 했다. 
한무제는 이곳에 무위(武威) 주천(酒泉) 두군을 세우고 관동 일대의 빈민들과 범죄자들을 이주시키고 후일에 흉노 사람 수만 명을 산동 반도로 이주시켰다. 

BC119년에 한무제는 다시 위청과 곽거병에게 각각 5만의 군사를 주어 흉노의 주력을 공격하여 그들을 더 북쪽으로 쫓아내었다. 이로써 한나라는 흉노의 직접 위협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무려 40여년에 걸친 전쟁에 군비를 조달하고 병사를 충원하다 보니 국고가 비고 국민의 숫자가 절반으로 감소하게 되었다. 전쟁의 주역 표기장군 곽거병은 오염된 물을 마시고 생명을 잃었고 연전 연승했던 위청은 이치사 선우를 잡지 못한 책임을 물어 대장군 자리를 한무제의 큰 처남 이광리에게 넘겨주었다. 

후일에 흉노는 호한야 선우의 동흉노와 질지 선우의 서흉노로 갈려지는데 서쪽으로 쫓겨난 질지 선우는 강거국에 정착했다가 후일 AD375년에 유럽을 휩쓴 훈족의 모체가 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BC89년 한무제는 오랜 전쟁으로 백성들에게 너무나도 큰 희생을 강요한 것을 참회하는 윤대(輪臺)의 조서를 발표하였다. 

당시의 양식 있는 지식인 사마천은 평준서(平準書)에서 한무제의 영토확장 정책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전쟁이 끊이지 않아 갑옷을 풀지 못하니 천하는 그 노역에 힘겨워한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작성자
김은한 칼럼니스트    기사 더보기
의견목록    [의견수 : 0]
등록된 의견이 없습니다.
이메일
비밀번호
100년을 이어온 김씨와 허씨의 우정 2014.11.10
<김씨의 뿌리(16)> 2014.11.05
보스톤 전망대
<김씨의 뿌리(13)> 2014.11.05
보스톤 전망대
흉노 정벌의 공신 이광, 위청 2014.11.05
<김씨의 뿌리(18)> 2014.11.05
보스톤 전망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