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담객설閑談客說: 빚진 나그네
보스톤코리아  2015-04-27, 11:56:46 
  봄이다. 초봄이고 뭐고 없다. 오히려 초봄을 건너뛰어 늦봄이고 초여름 날씨다. 
산사람도/넘기 힘든 얼음산
봄은 맨발로/넘어 왔다. (박방희, 제비꽃1)

  갑작스런 기온 변화에 내 몸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 계절만 탓한다. 제 몸 나이 드는 건 생각하지 않는 거다. 연세 드신 선배들께 방자한 언설이었다. 

  전직 대통령 이야기이다. 그가 정계은퇴를 선언한 후, 다시 정치판에 복귀한 다음이다. 정적들은 공격했다. 왜 거짓말 하느냐. 왜 말을 번복하느냐. 그의 대답이 매끄럽다. ‘거짓말 하지 않았다.’ ‘단지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뿐이다.’ 역시 말이 정치인답다. 거짓말과 위약違約과 말빚은 구별이 그닥 쉽지는 않다. 

소식을 전해 받는다. 카톡으로 오는데, 우울한 소식이 종종 섞인다. 본인이 병원에 입원했거나. 아니면 부모님이 병중에 계시다는 전언이다. 모시는 부모님이 당연히 연로하실테니,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울하기는 마찬가지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모두가 다 그렇다는 말이다. 시인도 수술 전날 밤엔 무서웠던 모양이다. 왜 아니겠나.

입원하러 가기 전날 밤
서랍에서 발견한 십년전 낙서
(중략)
하나님,
아직 처리할 게 많아요
제발 빚 좀 다 갚고 가게 해 주세요.
하느님, 아니 하나님이라도 좋아요
제발 십년만 더 살게 해 주세요.
(박덕규, 수술전야)

  시를 읽어 내려갈 적에 나를 보는 듯 했다. 내가 입원했을 적이다. 여름철이었는데, 방은 매우 추웠다. 냉방이 잘 된 탓인지, 내 마음이 추웠든지. 떨려오는 몸과 돋은 소름이 추위를 증명했다. 환자복으로 갈아입을 적에 벗어 놓은 신발을 보았다. 다시 그 신발을 신을 수 있을까. 제공된 덧신을 신어 발은 편했다만, 벗어 놓은 신발과 다시 만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나도 하늘에 수 많은 빚이 있는 모양이다. 하늘은 그 많은 빚을 갚고 오라고 집행유예기간을 주셨다. 

  말빚이라 했다. 법정스님은 돌아갈 적에 말빚을 더 이상 지지 않겠다 하셨던가. 그의 저서들도 모두 절판하기를 원했다고 했으니 말이다. 내게도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빚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빚투성이 되어 빚쟁이들에게 시달린다. 내가 진 빚은 말빚에 하늘과 땅과 세상에 뱉어 놓은 약속인게다. 결혼 전에 내가 장인 앞에서 큰소리쳤던 그 약속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다. 내 결혼식 주례 선생 앞에서 했던 결혼 서약도 그 중 하나다. 주례 선생이 물을 적에 ‘네’ 라고 크게 대답했더랬다. 그 대답소리가 이제 메아리 되었는데, 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말빚을 청산해야 할진대, 그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빚진 나그네 되었다. 이영길 목사 설교집 제목이기도 하다. 먼저 별 쓸데없는 충고는 하지 않기로 했다. 듣기를 게을리 하지 않을게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로마서 1:14)


김화옥  (보스톤코리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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