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87
보스톤코리아  2015-07-06, 11:57:35 
이원국李元國은 1907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났다. 19세에 일본으로 가서 중,고를 거쳐 1929년 일본 도쿄의 중앙대학(법학부) 재학시절에 당수도를 배웠다.(어릴적에 우리나라에서 택견을 수련했다고도 전한다) 그의 스승은 일본 가라데의 창시주로 불리는 후나고시 기친(船越義珍, 1868 – 1957)이며 그는 후나고시 밑에서 10여년간 수련하였다.(도쿄에서  5년간 수련하고 오끼나와에 가서 5년 수련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그후에 중국무술도 연마했다 – 완결 태권도 타임즈) 그리고 1944년 1월에 귀국하여 그해 8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현대적인 개념의 무도 도장을 개관하였다. 이것이 ‘당수도청도관’이며 현재의 서대문구 옥천동에 있던 당시의 영신학교永信學校 강당에서 시작되었다. 

그가 1968년에 발간한 저서인 ‘태권도교범’에 보면 태권도의 유래에 관해서 그의 견해을 피력한 부분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태권도의 기원은  어떤 특정한 인물이 언제쯤 창시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다만 인류가 발생한 이후 오늘날까지는 많은 사람에 의해 연구 첨가되어 계승된 끝에 현대의 태권으로 발전한 것이다.” 동감이 가는 객관적인 통찰이며 명철한 서술이다. 

그런데 그가 생존시 미국에서 살면서 타인들에게 나누어준 명함에는 “한국태권도 창시주(創始主), 총재 이원국(李元國)”으로 새겨져 있었다.
자신이 지은 ‘태권도교범’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태권도는 어떤 특정한 인물이 언제쯤 창시했다고 단언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이 지은 책의 내용을 잊지는 않았을텐데…, 명함 몇 장이 우리나라 현대 무도의 초석을 다진 청도관 창설자의 무도철학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태권도계의 원로들이나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그가 ‘한국태권도의 창시주’라고 주장함을 탐탁치 않게 보거나 전혀 수긍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청도관의 창시주’임에는 틀림없다. 

여기서 그의 파란만장한 삶의 일면을 살펴보면 그는 현대 태권도와 별로 연관이 없음이 나타난다. 1944년 귀국하여 당수도(일본의 가라데이며, 당시에는 ‘태권도’라는 명칭의 무도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도장을 열면서 ‘청도관靑濤館’으로 명명하였다. 여기의 ‘도濤’는 자신의 스승인 후나고시 기친의 ‘송도관松濤館’에서 ‘도’자를 따왔으며 스승의 무맥武脈을 잇는다는 뜻이다. 

이원국은 자신의 무도철학인 호신, 건강 그리고 정신수양의 꿈을 한껏 펼치려던 무렵 일본으로 밀항을 해야만 했다. 그는 ‘반민특위’124) 에 의해 친일파로 지목되면서 도일 하였다.(밀항 시기는 1950년, 또는 1951년 1.4 후퇴 직후로 상이한 기록이 있지만 그해 겨울이 분명한 것같다. 6월설도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자신의 청도관 당수도를 전파하였다. 그리고 그는 1961년 4월에 귀국하였다. 그 무렵은 우리나라에서 당수도/공수도가 최홍희가 작명한 ‘태권도’란 명칭으로 정착할 때였다(2007년 12월 3일자의 ‘태권도신문’에는 밀항한지 18년 만인 1968년에 귀국하여 가장 먼저 청도관 제자인 최규식 경무관의 무덤에 참배하였다고 한다. 최규식은 김신조 일당의 무장공비가 청와대 습격 당시 종로경찰서장으로 재임했으며 공비를 진압하다가 순직하였다). 결과적으로 이원국은 태권도 명칭의 작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의 제자인 남태희가 최홍희의 부관으로 있으면서 그와 같이 작명한 명칭이다. 고국에 돌아온 이원국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1963년3월 미국 이민길에 올라 여생을 미국에서 살면서 태권도를 보급하였다. 청도관의 창시자이며 우리나라 무도(태권도)계의 거성 이원국은 96세까지 장수하고 2003년에 작고하였다. 

이원국의 일본 밀항과 미국 이민을 계기로 손덕성이 청도관의 2대 관장으로 취임했고, 청도관은 분화되었다. 이용우가 서울 서대문구를 중심으로 정도관正道館을, 강서종이 인천에서 10여개의 지관을 규합하여 국무관國武館을, 고재천이 광주에서 청룡관靑龍館을, 최홍희가 군軍에서 남태희의 도움으로 오도관吾道館 등을 창관하였다.

124) ‘반민특위’는 ‘반민족행위 특별조사 위원회’의 약칭이며, 국권강탈에 적극 협력한 자와 일제치하의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 박해한 자 등을 처벌할 목적으로 1948년 9월 7일 통과된 법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반민특위는 이승만이 친일분자들의 충성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그의 노골적인 활동 방해를 받다가 1949년 6월 6일 특별경찰대가 강제해산 당하면서 기능이 상실되었다. 그런데 이원국은 반민특위의 활동이 사실상 없어진 1950-51년에 밀항하였다. 친일로 몰려서 도일한건지 다른 이유인지 석연치 않는 부분이다.(6.25 발발 후 공산당에 부역했다는 설도 있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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