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146
보스톤코리아  2016-09-26, 12:15:08 
* 앞으로 나오는 ‘화랑세기’는 필사본을 중심으로 번역한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2005년)’ 를 인용했다. 또한 15세 풍월주 유신공조 앞부분까지 탈락된 곳은 발췌본으로 보충했다. ‘화랑세기’의 필사본은 1989년에 세상에 출현했다. 

[… 당시 이화랑공보다 더한 미남자가 없었음을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 건복建福 17년 원광이 신라로 돌아오자 이화랑은 풍월주 지위를 넘겨주고, 숙명과 새달 그리고 제손諸孫을 거느리고 국내의 승지를 두루 돌아다녔는데, 다섯 번 슬라에 들어가고 여덟 번 금오를 돌았다. … 하루는 조용히 공주에게 말하기를 “신은 공주와 더불어 시측한 지 40년이고 어수魚水의 낙이 지극한 … 까닭에 태후와 대왕을 따라 옥경玉京으로 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했다. 공주가 말하기를 “낭군이 향하는 바를 첩妾은 마땅히 따라야 합니다” 했다. 마침내 나란히 누워서 죽었다. 새달 역시 따랐다. 때는 건복 20년 3월이었다. 애공사哀公寺 북쪽 지소태후 능(곁)에 장사 지냈으니, 유명遺命이었다. 아! 성대하다.]

건복이란 연호는 진평왕 6년, 584년부터 사용했다. 진평왕의 이름은 김백정이고, 아버지 진흥왕의 후궁이었던 보명궁주와 사통을 하다가 개에게 물려죽은 동륜태자의 아들이다. 동륜이 갑자기 ‘개 사건’으로 인하여 ‘개 죽음’을 당한 후 왕권은 동생인 금륜에게로 갔다. 그가 신라의 25대왕 진지왕이다. 진지왕은 미실이 세웠다. 당시 진흥왕이 죽기 직전 그를 모시며 새주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미실은 왕이 고명으로 장손자인 백정을 차기 왕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숨기고 남편 세종, 남동생 미생, 연인 설원랑 등과 모의하여 자신을 왕후로 책봉하는 조건으로 진흥왕의 둘째 아들 금륜을 왕으로 세웠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진지왕은 미실과의 거래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삼국유사에 나오는 도화녀와의 이야기처럼 다른 여자들과 주색에 빠져 결국 즉위한지 4년, 사도태후와 미실파에 의해 폐위당했다. 

사실 진지왕은 왕위에 있으면서도 별로 한 업적이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삼국사기에 나오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은 화랑세기와 결부시키면 화랑세기가 위서가 아니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초기에는 친정을 조금했지만 재위기간 줄곧 상대등 거칠부(황종)가 대리청정을 하였다. 그리고 사도태후와 미실이 일으킨 정변 후에는 세종과 설원일파는 화랑을 장악하고, 상대등 노리부가 대리청정을 하였다.180) 그리고 곧 진평왕을 즉위시켰다. 삼국사기의 내용은 진흥왕이 죽으면서 손자 김백정(죽은 동륜태자의 아들)이 어린 관계로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거칠부와 김무력 일파가 둘째아들 금륜을 등극시켜서 실권을 잡았다. 그러다가 거칠부가 죽은 후 정적인 노리부 일파가 정권을 잡으면서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진평왕을 옹립하였다. 하지만 화랑세기에서는 미실의 ‘왕후거래’와 사도태후가 아들 백정을 보위에 올리려는 야욕과 함께 대원신통의 우두머리로서 대원신통으로 하여금 왕실의 인맥姻脈을 이으려는 즉 ‘골과 품’의 정쟁으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권력의 추는 쉬지않고 움직이면서 폐주 진지왕의 손자가 후일 왕위에 오른다. 김용춘은 진지왕의 아들이며,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이다. 김용춘의 부인은 천명공주이다. 천명공주는 진평왕의 딸이며 선덕여왕의 동생이다. 

건복17년, 그러니까 600년에 원광이 신라로 돌아왔다. 광대한 중국땅에서 불도에 심취하여 도량을 넓힌 아들이 오랜만에 귀국하였으니 이화랑은 한없이 기뻤다. 또한 사다함이 대인의 기질을 갖추고 따르는 화랑의 무리가 많은지라 풍월주의 지위를 그에게 넘겨준 뒤, 부인 숙명공주와 첩 새달 그리고 모든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3년간 신라의 명승지를 주유하면서 선도仙徒의 기氣를 득도하였다. 공주를 사랑하여 궁궐을 버리고 같이 도망쳐서 산지가 40년, 그는 말년에 신선과 같이 노닐다가 죽을 날도 예측하여 장모인 지소태후와 진흥왕이 먼저 간 옥황상제가 산다는 옥경玉京으로 부인 숙명공주와 첩 새달과 나란히 누워서 603년에 죽었다.
 
180) 정사에는 노리부가 세종인데, 화랑세기에는 다른 인물로 등장한다. 즉 노리부는 진흥왕의 왕후인 사도의 오라비로 나오고, 세종은 진흥왕과 동복이부로 나온다. 그러나 노리부의 부모가 사도의 부모인 박영실과 옥진궁주인지의 기록은 없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사절요,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신라속의 사랑 사랑속의 신라(김덕원과 신라사학회, 경인문화사)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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