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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혁명 (1979) 그리고 이란 인질 억류 사태 (1979~1981) (1)
오늘, 다시 읽는 미국사
2017년 6월 7일, 1979년 이슬람 혁명의 상징인 호메이니의 묘역이 테러 공격을 받다.
보스톤코리아  2017-06-26, 11:11:28   
역대 미국대통령 중 지미 카터는 퇴임 이후 더 사랑받은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다. 퇴임 이후 30년이 넘도록 비영리 기관인 카터 재단을 통해 제 3 세계의 민주주의 정착을 위한 활동에 매진했고, 독재자들의 인권 유린 문제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이는 한편 분쟁의 중재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저소득층에게 집을 지어주는 해비타트 운동에도 적극적이었던 모습 등이 “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이미지다. 그가 수상한 노벨 평화상 역시 인권 향상 및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한 노력에 대한 인정이었을 게다. 

하지만 그의 재임시절 카터에 대한 평가는 냉혹했다. 카터의 후임인 로널드 레이건은 취임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부는 현재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다. 내가 봤을 때는 정부 자체가 문제다.” 뉴딜을 들여온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후의 ‘큰 정부’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탈 (기업) 규제 및 부자 감세, 복지 축소 등, 이른바 레이거노믹스를 이야기했던 것. 하지만 연설의 맥락에서 레이건이 지칭하는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이란 경제적으로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 (저성장 고물가), 외교적으로 이란 인질 억류 사건 및 소비에트의 아프간 침공 등의 사건 등 카터 행정부의 실패로 인식되는 “문제들”로 읽히기도 한다. 

그런데 적어도 외교의 영역에서 카터 행정부가 ‘무능한’ 정부의 낙인이 찍히게 된  가장 큰 빌미를 제공한 사건은 이란 인질 억류 사건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란의 인질 억류 사건의 발단은 팔레비 왕조의 입헌 군주제를 폐기하고 이란의 재이슬람화가 이루어지게 되는1978년~79년의 이란혁명이다. 이란 혁명의 다소 복잡한 배경을 이해하려면 1950년대로 거슬러가야 한다. 1950년대 초반 이란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던 민족주의 계열 총리 무하마드 모사데크가 당시 이집트의 석유산업을 독점하던 영국의 석유 회사 앵글로 페르시아 (현재의 BP: 브리티시 페트롤륨) 국유화를 추진했다. 모사데크의 석유 산업 국유화 단행은 1950년대 중동 산유국들의 자원민족주의의 시초격인 사건이었다. 또한 모사데크는 석유 산업 국유화를 저지하려던 국왕 팔레비 2세 (모하마드 레자 샤Mohammad Reza Shah)의 권한을 제한하는 등 갈등이 생겼다. 그런데 이란의 석유 국유화는 영국과 미국 등 서방세계의 이해관계와 충돌하였기에, 미국의 CIA 등이 주도하여 모사데크를 제거하고 팔레비 2세를 다시 왕위에 앉혔다. 이후 팔레비왕조는 노골적인 친미, 친영 노선을 걸었다. CIA는 레자 샤가 사바크(SAVAK)라는 정보 조직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레자 샤 국왕의 입장에서는 정치적 반대파를 견제하여 왕권 체제를 유지하고자하는 목적이 있었고, 미국의 입장에서는 이란에서의 비밀경찰활동을 토대로 소련의 중동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사바크는 레자 샤가 누린 독재적 권력의 토대가 되었다. 

레자 샤가 왕권에 복귀한 후, 미국은 이란내 주둔 미군에 대한 치외법권을 요구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서구식 개혁과 진보를 추진할 것도 요구하였다. 레자 샤는 1963년부터 백색혁명을 단행했다. 백색혁명은 토지 개혁, 여성 참정권, 국유기업의 주식회사로의 전환 등을 포함한 서구식 근대화의 과정이었다. 문제는 샤의 백색 혁명이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일반 국민들의 삶을 개선시키지 못한 채 일부 기득권층의 이익만 증진시킨 개혁이었다는 데 있다. 샤의 백색혁명과 공포정치에 대한 반발이 극에 달했다. 이란의 세속화에 대해 이슬람 성직자들이 반발했고, 밀려드는 서구 물품으로 피해받는 소상공인들이 반발했고, 무차별적인 서구화에 지식인들이 반발했으며, 미국식 근대화에 대해 좌파가 반바했다. 결국 백색혁명에 반발하다가 1963년 국외로 축출되었던 이슬람 시아파의 최고 성직자인 루홀라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를 중심으로 1978년 과도 혁명정부가 수립되고 1979년 이란 공화국이 세워졌다. 이후 이란의 정치, 사회, 문화, 교육의 모든 영역이 서구의 그늘을 걷어내고 “이슬람”중심으로 재편되는 양성이 된다. 

이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축출된  국왕 모하마드 레자 샤 는 1979년 초 ‘휴양’을 핑계로 국외로 탈출했다. (그리고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샤는 곧바로 “신병치료”를 위해 미국에 입국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샤의 요청을 받아들였던 카터 행정부의 판단은 결국 이란 혁명 세력 중 강경파의 크나큰 반발에 직면하게 되었다. 샤의 입국을 허락한 일 등에 대한 항의의 조치로서 이란 혁명 강경파 세력은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직원 70여 명을 인질로 억류했다. 



보스톤코리아 칼럼리스트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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