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빛 (6)
보스톤코리아 연재소설
보스톤코리아  2018-06-04, 11:03:54 
겨우 4년을 함께 산 여자에게 자신에 대한 정이 먼저일리 없다. 그런 여자를 밖으로 내보내야 할 때 가장 쉬운 방법은 말 못하는 이민자들이 모여 일하는 곳에 넣는 것이다. 그곳의 생태를 잘 아는 남편은 량이 어떻게 절망하며 어떻게 자신에게 붙들려 있을 수밖에 없는지를 누구보다 잘 안다. 남편은 그곳에서 퇴직을 했기 때문에 쉽게 량을 취직시킬 수 있었다. 음식 재료를 손질해서 포장하는 라인에 량을 넣었다.

량이 몇 년 간 집안에서 아무리 영어 공부를 했다 해도 실제로 입을 열어 영어를 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는 단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량은 자신의 마음을 믿지 않았다. 마음이 고통스러워도 그 마음은 몸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변한다. 마음은 필요에 따라 변할 수 있지만 몸을 둘 자리는 쉽게 변경할 수 없다. 량에게 있어 말이 통하지 않아서 힘든 것은 고통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아주 가벼운 것이다. ‘난 죽는 날까지 가난할 것이다. 난 죽는 날까지 이 좁은 방에서 낡은 옷을 입고 아이를 키우다 어느 날 엄마처럼 아이를 죽도록 때리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기억 속의 공포는 자신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맞물려 진행되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진행 과정조차 별 의미가 없다. 자신의 변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는 것에 당황하던 모습도 흐릿하다. 모성이란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는 것이고 자식을 향한 엄마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 당연한 것도 량에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이 인간의 상식선에서 흐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 고통이었다가 당연하게 되는 순간들을 지나왔다. 이런 말 따위 통하지 않는 것이 무슨 고통인가. 자신보다 22살이나 많은 남자에게 여자의 냄새를 풍기는 것이 쉬운가? 이를 악물고 그 짓을 해야 한다. 량은 자신에게 하루에도 여러 차례 묻는다. 왜 이런 삶을 선택했는가에 대해서. 세상에는 시대별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정해놓은 모범 답안이 있다. 시대를 뛰어넘어 어떤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모범 답안과 거리가 있는 삶을 살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생물학적인 호르몬 작용에 의해 생기는 사랑 그리고 모성이라는 마음은 계속 유지되면서 변화한다. 처음에는 불려 나온 기억 때문에 자신이 변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으나 이제는 자신의 욕망이 불러낸 기억은 밖으로 뛰쳐나오기 위한 도구였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 누구도 옆에 남아 있지 않았다. 변해가는 자신 때문에 량의 내부에서는 전쟁이 일고 있었고 엄마, 남편, 아들, 친구 모두가 량이 치르고 있는 전쟁의 내용을 알지 못했다. 외부로 흘러나오는 전쟁의 핏물에 지레 량과 멀어지는 것을 그들은 택했다.

량은 이제 이 직장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돈도 벌어야 하고 영어 공부도 해야 한다. 남편에게서 떨어져 있는 8시간은 자유롭다. 남편이 직장 앞에 내려주고 서로 손을 흔들고 헤어지면 그 순간에 세상은 다른 색깔로 변한다. 연초록빛의 나뭇잎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하고 문 옆에 서 있는 라일락 나무의 꽃향기는 뱃속에 갇힌 모든 탄성의 소리를 한꺼번에 질러보고 싶게 했다. 량은 일을 열심히 했다. 량은 4년 동안 집안에서 익힌 영어 실력을 뽐내고 싶었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한 달 정도 지나자 량의 직장에서는 영어가 필요 없다는 것을 알았다. 말을 못하는 중국, 베트남, 네팔 등등의 나라 사람들에게 미국에서 정한 노동법 두 시간마다 15분 쉬게 하고 7시간은 꼬박 서서 일을 하게 하는 이 직장은 량이 생각했던 것과는 분위기가 좀 다르다. 잠시도 쉴 틈 없이 무거운 것을 들어야 하고 썰어야 하고, 다듬어 포장해야 한다. 량은 좀 더 나은 생을 위해 다 버리고 다 끊어냈다. 자신같이 독한 년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은 다 량과 흡사한 여자들을 모아 놓은 곳이다. 이들은 살기 위해 그들의 일과 시간을 관리하는 슈퍼바이저에게 동료의 잘못된 점을 늘 갖다 바친다. 슈퍼바이저도 다른 나라에서 건너온 여자이지만 수 십 년 전에 건너와서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 여자는 공장에서 일하는 여자들의 여왕이다. 오랜 세월 동안 그 방면으로 진화된 여자다. 어떻게 해야 자신의 편을 만들어 세를 키울 것인가를 늘 연구한다. 그 여자는 새로 들어오는 종업원을 길들이는 법을 안다. 돈을 더 준다는 이유로 무조건 오버타임을 시킨다. 처음에는 돈을 버는 맛에 모두 오버타임을 하지만 곧 방광염이나 하지 정맥류에 이상이 생긴다. 한번 거절하면 그 뒤로는 소외시키기 시작한다. 함께 밥을 먹지 못하게 하거나, 전체 직원이 일을 해야 하는 행사에 그 종업원만 끼워주지 않거나, 그 직원이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 듯싶으면 악착같이 그 직원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한다. 이곳에서는 계획이라는 것을 세울 수 없는 곳이다. 4년 동안의 영어공부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웠다. 단어 위주로 외우다 보니 한 단계 위의 슈퍼바이저나 매니저의 말을 토막토막 이해했다.
 (계속)


유희주 작가
유희주 작가는 1963년에 태어나 2000년『시인정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2007년 미주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을 수상했다. 
2015년 『인간과 문학』에 소설 『박하사탕』을 발표하며 소설 작품 활동도 시작했다. 시집으로 『떨어져나간 것들이 나를 살핀다』 『엄마의 연애』, 산문집으로 『기억이 풍기는 봄밤 (푸른사상)』이 있다. 
유희주 작가는 매사추세츠 한인 도서관 관장, 민간 한국 문화원장, 레몬스터 한국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코리안릿닷컴(koreanlit.com)을 운영하고 있다.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의견목록    [의견수 : 0]
등록된 의견이 없습니다.
이메일
비밀번호
조카와 조카며느리의 결혼을 축하하며... 2018.06.04
지난 토요일(05/26/2018) 오후에 한국 서울 용산 미군부대 Dragon Hill Lodge Gate에서 시아주버님과 형님의 큰아들인 큰 조카의 결혼식이 있..
한담객설閑談客說: 퇴고推敲와 도규刀圭 2018.06.04
봄을 지나, 한참 초여름 입구에 섰다. 꽃잎도 하염없이 떨어진다. 계절이 바뀌면 어차피 떨어져야 하는 법. 떨어지는 꽃잎이 칼바람을 맞은건 아니다.한국검도를 배우..
둥근 빛 (6) 2018.06.04
겨우 4년을 함께 산 여자에게 자신에 대한 정이 먼저일리 없다. 그런 여자를 밖으로 내보내야 할 때 가장 쉬운 방법은 말 못하는 이민자들이 모여 일하는 곳에 넣는..
재산세(Real Estate Tax)와 모기지 이자(Home Mortgage Interest) 2018.06.04
주택을 구입하여 보유하다 처분하면 그 단계별로 여러가지 비용이 든다. 이번주부터는 주택과 관련된 수익과 비용이 세무상 어떻게 처리되는 지 살펴보자. 주택의 구입과..
25년 투자 조언 2018.06.04
투자는 경비가 저렴한 인덱스펀드로 구성된 포트폴리오를 운용할 것을 지난 25년 동안 추천했습니다. 투자의 귀재라 불리는 워런 버핏도 2015년 주주총회 때 ‘미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