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르고의 횡설수설 14 ] 시간이 머무는 것들
보스톤코리아  2020-06-01, 11:11:34 
온 몸을 찌릿하게 만드는 순간적 통증. 온전하게 아물지 못한 상처에 남아있는 옹이는 날카로운 모서리나 둔탁한 물건에 부딪힐 때마다 날카로운 통증을 불러온다. 늘 급하게 움직이다가 모서리나 벽에 부딪히는 습관은 이 나이가 되도록 고쳐져지질 않는다. 최근에는 출입문의 통유리에 부딪혀 눈썹 위에 상처가 생기기도 했다. 수십 년 전에도 통유리에 부딪혀 안경을 부러뜨린 적이 있는데. 누굴 탓할 수도 없고 이러는 내 자신이 참으로 한심스럽다. 

오늘은 자동차의 문을 급하게 닫으려다가 오른손을 모서리에 부딪쳤다. 살을 에는 듯한 통증.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이 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오른손 검지의 첫째 관절 부분에 커다란 흉터가 있다. 어린 시절 낫에 벤 상처의 잘려나간 피부가 서로 어긋나 붙었고 그 선이 옹이처럼 좀 튀어나온 채 손가락을 반 바퀴 정도 둘러싸고 있다. 그 흉터의 튀어나온 부분이 날카로운 모서리나 둔탁한 물건에 부딪힐 때마다 오늘처럼 온 몸을 마비시키는 찌릿한 통증을 유발하곤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린 시절 나는 물건을 다루는 데 젬병이었다. 툭하면 다치거나 물건을 망가뜨린다. 게다가 왼손잡이라 오른손잡이용 물건들을 다루는 것은 더더욱 서툴렀다. 군대 갔을 때는 사격훈련이 정말로 심각한 문제였다. 모든 총이 오른손잡이용이었기 때문이다. 자칫 사고라도 날까봐 사격 훈련이 있을 때마다 나는 노심초사했고 훈련관은 아예 내 옆에서 만일을 대비했다. 아무튼 대부분의 상처는 오른손에 집중되었고 온갖 흉터들이 오른손에 남아있다. 

아마도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던 것 같다. 땅거미가 질 무렵 소를 먹일 풀을 베러 나갔다가  나는 손을 베었다. 아버지에게 혼나는 것이 무서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저녁도 거른 채 일찍부터 자는 척 했다. 다행히 더는 피가 나오지 않았고 나는 두 손가락을 꼭 붙인 채 잠이 들었다. 손가락을 얼마나 꼭 쥐었던지 아침이 되어서 보니 검지와 장지가 상처를 감싼 천조각과 함께 한 덩어리가 되어있었다. 상처는 그렇게 나만의 비밀로 남았다. 그 후 흉터에는 종종 통증이 찾아오곤 했지만 그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성인이 된 후에는 흉터를 잊고 사는 일이 잦아졌다. 오늘처럼 둔탁한 물건이나 모서리에 부딪히지만 않으면. 

잊힐 만 하면 찾아오는 그 통증은 정말 ‘상처’일까? 수십 년을 그 통증과 함께 살면서 나는 상처와 함께 사는 법을 깨달았다. 그것을 ‘상처’가 아니라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흉터’가 아니라 ‘기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오른손에 남아있는 여러 ‘기념물’에는 일곱 살 때의, 혹은 열두 살 때의 삶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약국에 가려면 한나절을 걸어가야 했고, 병원은 하루에 한번 있는 새벽 버스를 타고 군청이 있는 읍내까지 한나절을 가야했던 시절. 웬만한 상처는 그냥 넘어가거나 된장을 바르는 것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법이었다. 홍역에는 벌꿀을 순무 속에 넣고 화로에 구워서 아침저녁으로 먹었다. 그러다가 증상이 더 심해지면 아랫목에 눕혀 삼신할머니의 처분을 기다릴 뿐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온갖 질병으로 아버지를 찾아와 침을 맞았지만 낫에 베인 손가락은 아버지의 침으로 고칠 일이 아니었다. 내가 잦은 상처들에 대해 알리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남은 ‘흉터’가 없었다면 지금 나에게서는 많은 시간들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기억의 소환을 위해 흑백 사진이나 어쩌다 쓴 일기장을 뒤져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진이라고 해야 나에게는 초등학교 입학 직전 처음 가본 사진관에서 찍은 가족사진과 초등학교 졸업사진이 전부이다. 며칠에 한번 씩 학교 숙제로 쓴 일기장은 그나마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다. 그보다는 내 몸에 붙어 다니면서 ‘시간’을 멈춰 세운 그 흉터들이 나에게는 더 즉각적인 추억이고 기념물이다.  

시간을 멈춰 세우는 것들. 그것은 각자에게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몸의 흉터일 수도 있고, 추억의 장소일 수도 있다. 가족에게서 혹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받은 물건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거기에는 바로 그때의 시간이 고스란히 멈춰 선 채 우리를 미소짓게 만든다. 

나는 지금 거울을 보면서 여섯 살의 나를 본다. 참꽃(진달래)를 꺾으러 앞산에 올랐다가 굴러 떨어지던 아이. 아이는 나무뿌리를 잡으려고 손을 뻗어보지만 더욱 빠른 속도로 굴러 떨어진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메밀을 심으려고 화전을 개간해놓은 터라 흙은 부드러웠고 나무토막처럼 산기슭까지 굴러 떨어진 아이는 아픔을 느낄 정신이 없다. 젊은 엄마는 이마의 피를 닦아낸 후 거기에 찐 감자를 감싼 김치를 붙이고 그 위에 붕대를 두른다. 덕분에 상처에는 고름이 생기지 않았고 사각형의 흉터 외에는 말끔하게 나았다. 이마에 감자붙인 아이라고 놀리곤 하던 춘섭 엄마는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실까?


올댓보스톤 교육컨설턴트, orugo4u@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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