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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한 컬럼 [4] 일본 다시보기-후쿠오카 II
보스톤코리아  2009-01-30, 16:26:58   
3) 충신 박제상(朴堤上).
신라 17대 눌지왕 때 그의 동생 미사흔이 왜국에 볼모로 잡혀가 있었다. 신라의 충신 박제상은 미사흔을 신라로 도망시키고는 왜왕에게 발가죽을 벗기는 벌을 받고는 불에 타 죽은 사람이다.

삼국유사에는 그가 지금의 대마도로 귀양갔다가 불에 타 죽은 것으로 써있는데 실은 그의 무덤이 하카다의 어느 언덕에 있다는 기록이 많이 있다. 무덤의 위치를 모르는 것이 몹시 아쉽다.

고려말에 포은 정몽주가 일본에 외교 사절로 왔다가 하카다에서 박제상을 조상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시대에는 조선통신사들이 일본을 드나들며 하카다에서 박제상의 순국지를 기렸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통신사들이 일본을 다녀온 다음에 편찬한 책들이 수십권이 되는데 그중에 제일로 치는 책이 산유한의 '해유록'이다.

그는 숙종때 도꾸가와 요시무네의 쇼군 계승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한 조선통신사의 제술관으로 일본에 가게 되었다.

예리한 관찰로 당시의 일본사회를 자세히 묘사한 일기책이 해유록인데, 일본에 대한 관찰을 이보다 더 자세히 쓴 책이 없다는 정도로 절찬을 받은 일본견문록이다.

그의 해유록에 "복강(후쿠오카) 10리 밖에 박다진(博多津)이 있다. 이곳은 신라 충신 박제상이 충의를 위하여 죽은 곳이다"로 기록하여 박제상의 무덤이 하카다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처음으로 일본에 통신사로 온 사명대사가 하카다 만에 있는 작은 섬 아이노시마(相島)에 머물고 있을 때 임진왜란 왜군의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로 백제왕의 후손을 자처하는 요시토시의 수행을 받게 되었다.

요시토시가 사명대사를 하카다의 언덕에 있는 박제상의 무덤으로 모시고 갔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 박제상의 순국비는 대마도 북안에 한반도를 향해 서있다.

삼국유사에는 박제상 가족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눌지왕은 홀로 남은 박제상의 아내를 국대부인(國大婦人)에 봉하고 그의 둘째딸을 왜국에서 돌아온 미사흔의 부인으 삼았다. 그러나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한 부인은 세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하다가 죽고 말았다. 그래서 그녀를 치술신모(神母)라고 하게 된 것이다.

이상이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이고,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박제상은 1남3녀를 두었는데 장녀와 세째딸은 어머니와 함께 치술령 망부석의 혼이 되었고 둘째딸 박아영은 미사흔 왕제와 혼인한 후에도 어머니의 유지를 받들어 여섯 살 밖에 안된 남동생 박문량을 양육했다고 한다. 후일에 방아타령을 작곡한 백결 선생이 박문량이었다고 전해 오고 있으나 확인할 길은 없다.

後日에 영남의 대학자 김종직(金宗直)은 "치술령의 망부석"으로 이들의 혼령을 달래주고 있다.

치술령 고갯마루 일본을 바라보니/ 하늘에 맞닿은 푸른 바다 가이 없네/ 우리님 떠나실제 손을 흔드시더니/ 살았는가 죽었는가 소식도 끊겨/ 소식이 끊기고 길이 헤어 졌으나/ 죽던 살던 언제가는 서로 볼날이 있으리라./ 하늘 향해 울부짖다 망부석이 되었으니/ 매운 기운 천년토록 허공위에 푸르리라.

4) 여몽 연합군의 일본 정벌
후쿠오카 현청 옆에 있는 히가시(東)공원, 바로 이곳이 1274년에 여몽 연합군과 왜군 사이에 첫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지하철로 가려면 하코자키 노선의 지요겐초구치역에서 내리면 된다.

우리는 여몽 연합군이 일본에 상륙하기 전에 태풍을 맞나 실패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사실은 이와 다르다.

1274년10월3일 여몽 연합군 33,000 여명을 태운 900여척의 군선이 합포(마산)를 출발해서 5일에 쓰시마, 14일에는 이키섬을 전격적으로 점령하고, 19일에는 규슈의 하카다 만에 도착했다.

20일에 상륙해서 지금의 히가시 공원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규슈의 무사들이 분전했지만 전술이나 무기가 막강했던 몽고 군대에게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삽시간에 만명이 넘는 군사를 잃고 남쪽에 위치한 태재부(太宰府)로 도망쳐 버렸다.

일대일 전투에 익숙한 왜군들에게는 대단위 부대 전술로 비호처럼 달려드는 여몽군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왜군의 무기는 긴창이나 독화살을 메긴 강궁이 고작이었으나 몽골군은 생전 구경조차 못하던 철포를 쏘아대는 통에 혼비백산할 수 밖에 없었다. 왜군에게 다행인 것은 여몽군은 밤이 되면 공격을 중지하고 그들의 군선으로 철수하곤 하였다.

고려의 김방경 장군이 육지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진격하자고 주장했지만 몽고의 혼도와 홍다구 장군은 피곤한 군사를 적진깊이 머물게 할 수 없다면서 다시 배로 돌아오곤 하였다.

진짜 이유는 몽고군이 고려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육지에서 몽고군이 주둔하고 있으면 수군을 관장하고 있었던 고려군이 떠나버릴 것을 염려해서 내린 조치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밤, 그날도 여몽군은 낮 공격을 마치고 그들의 군선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난데없는 태풍이 불어닥쳐 하카다만에 산더미 같은 파도가 밤새 휘몰아 쳤다. 날이 밝자 어제까지만 해도 하카다 만을 가득채웠던 연합군의 군선은 참담하게도 한척도 보이지 않고 부서진 나무조각과 수많은 시체들이 바다 위에 떠 있었을 뿐이었다. 이때 익사한 연합군이 13,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일본은 태풍 덕택에 전쟁에는 패배하고도 여몽 연합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사실은 가메야마 천황이나 가마쿠라 막부의 수장 도키무네 두사람은 모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가메야마 천황은 신궁에서 "내 목숨을 국난과 바꾸고 싶다"며 기원하고 있었고, 도키무네는 혈서로 불경을 쓰면서 빌고 있었다.

여몽 연합군의 두번째 정벌도 태풍으로 실패했다는 소식이 일본 전역에 전해지자 이것은 분명히 가미가제(神風)가 일어난 것이라며 "일본은 신의 나라"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계기가 된것이다.

일본은 예전에는 백제에게 의존하다가 백제가 망한 다음에는 홀로서기의 민족주의로 전향하게 되었다. 여몽 연합군을 물리친 다음에는 "신이 보호하는 나라"라는 배타적 민족주의가 확립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때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대동아공영'이라는 침략제국주의를 가미가제로 포장했다가 21세기에는 침략을 정당화하는 야스꾸니 신사 참배와 교과서 왜곡으로 국수주의를 고집하게 되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한번도 몽고군을 물리친 적도 없는 일본 보다는 네번에 걸친 몽고군의 침입을 40년에 걸쳐 막아낸 고려에게 더 후한 점수를 주어야 할것이다.

전세계 문명권의 2/3를 정복한 몽고군에게 대항해서 이렇게 장시간에 걸쳐 항전한 나라와 민족은 고려가 유일무이한 국가였다. 우리도 위대한 조상에 대한 자부심을 가슴깊이 간직하여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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