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한 컬럼 [6] 일본 다시보기-후쿠오카 IV
보스톤코리아  2009-02-20, 14:59:36 
후쿠오카 공항에서 공항선 지하철을 타고 가다 도진마치 바로 직전에 있는 오호리코엔(오호리공원) 역에서 내리면 공원 동쪽에 헤이와다이 (平和台) 야구장이 있다.

1987년에 바로 이곳에서 아시아의 고고학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야구장의 외야 관람석 보수 공사때 예전 고로칸의 유적터를 발견했고 그곳 지상에서 수거한 유물만도 3천 여점에 이르는데, 중국 월주(지금의 절강성)의 청자가 대부분이고, 신라자기 외에도 이슬람의 도기와 와당류들이 출토되었다.

한국 전라남도의 완도에 있는 청해진터에서 발굴된 것과 같은 종류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고로칸은 백제가 망하고 난 다음 헤이안시대 (794-1185)에 일본의 외교와 무역을 위해 건축한 영빈관으로 교토, 오사카, 쓰쿠시(후쿠오카) 세 곳에 설치하였는데 그 중에서 유일하게 다자이후 정청에 예속된 후쿠오카의 고로칸이 발견된 것이다. 후쿠오카 고로칸이 한국인들에게 특별한 이유는 통일 신라때 동아시아 해상 무역을 독점했던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활동무대였기 때문이다.

당시에 신라와 일본의 관계는 아주 심각한 적국의 관계였지만, 신라는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는 일본과의 무역이 필요했고 일본도 신라와 당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당시 해양 무역을 주도하고 있던 신라와의 교역이 꼭 필요하였다. 그래서 국가간의 무역을 제쳐 놓고 일본은 다자이후에 있는 태제부의 통제하에 신라의 장보고 선단과 대규모 무역을 하게 된 것이다. 고로칸에서 발견된 유물과 청해진 옛터에서 발굴된 유물이 비슷한 것은 바로 장보고 선단이 무역을 주재하였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당시에 독자적으로 배를 타고 황해나 동지나해를 건너 중국까지 갈 수 있는 항해 능력이 없었다. 당시에 황해를 오고간 배들은 신라선이 주종이었고 배를 다루는 선원들도 거의가 신라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신라의 문물에 목말라 하던 일본의 귀족들은 신라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정부의 정창원(正倉院=지금의 조달청)에 신라문물 구입허가 신청서를 제출하면 다자이후 태제부를 통하여 주로 장보고 선단으로부터 구입하곤 하였다는 문서가 정창원에서 다량 발견되었다.
신라선의 외형은 선수와 선미가 위로 올라 가게 만들었는데 크기가 커서 1척에 120~160명이 탈 수 있었다고 한다.

일본도 태제부에 명하여 신라선을 제조하라는 지시를 하곤 했지만 배를 잘 다루는 선원들은 모두 신라 사람들이어서 해상 무역은 신라 사람들이 독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일본인들은 항해에 앞서 안전 귀환을 위해 신라 명신(新羅明神)을 모시곤 했었다. 일본 천태종(天台宗) 스님들의 입당구법 활동에는 재당, 재일 신라인들과 장보고 선단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804년 일본 天台宗 조사(祖師) 사이쪼(最澄, 767-823)가 입당하기에 앞서 다자이후 태제부와 가와라(香春 = 후쿠오카현 다가와시)에 와서 신라국신에게 사은하며 당나라에 가는 뱃길의 안전을 기원하였고 돌아와서는 즉시 가와라에 신라국신을 모신 신궁원(神宮院)을 창건하였다.

사이쪼의 제자이면서 천태종 3세 좌주인 엔닌 스님은 두 번이나 일본배로 당나라에 가려고 했으나 풍랑으로 실패하고는 세 번째에 장보고 선단의 도움으로 입당하여 신라 사람들의 도움으로 산동반도의 적산 법화원에서 10년 동안 구법하였다. 장보고 선단으로 귀국하여 신라명신에 사은하고, “입당순례행기”라는 일기장을 편찬하여 신라인들과 장보고의 활동상을 세상에 알렸다.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유지에 따라 교토 근처에 있는 천태종 本寺 인 엔랴쿠지(延曆寺)에 적산선원을 건립하고 신라 적산대명신(赤山大明神)을 모셨다.

천태종 5세 좌주인 엔진 (円珍)은 신라 무역상 흠량휘의 선편으로 입당하여 불법을 구한 뒤에 귀국하여 교토근처의 오오쯔시에 있는 원성사에 신라선신당 (新羅善神堂)을 세워 신라신을 봉제하고 있다.

천태종 3세 좌주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중에 장보고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다. “저는 생전에 각하를 뵈옵는 영광을 아직 갖지 못하였습니다만, 각하의 위대함은 전부터 들어왔기에 저의 흠모하는 마음은 더욱 깊어만 갑니다. 봄이 한창이어서 이미 따뜻해졌는데 엎드려 바라 옵건데 대사의 존체가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장보고에게 입은 은혜가 태산과 같고 은덕의 깊이를 형용할 바 모른다는 등 거의 신격화할 정도로 감사의 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가 모신 적산대명신은 장보고일 가능성이 높다.

속일본후기에 적혀 있기를 일본 정부가 장보고 선단과 독자적인 무역관계를 설정하고 신라, 당의 선진문화와 물품 공급을 그 선단에 의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의 기록에는 당나라 때 대문장가인 두목의 번천문집과 당서(唐書), 문헌통고 등에서 장보고의 청해진을 상세히 언급하고 사심을 버리고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 인물로 “진(晉)의 기해(祁奚)가 있고 당나라에 곽분양과 장보고가 있었다. 누가 동이에 사람이 없다고 할것인가”라고 장보고의 위대함을 거론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도 김부식은 장보고를 구국영웅 을지문덕과 나란히 비교하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바다경영을 잘하는 나라는 언제나 흥하기 마련이다. 한반도는 장보고 시대를 전후하여 동아시아 해양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거시적인 안목이 결여되어 내륙 지향성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한반도의 위상도 크게 위축되왔었다.

장보고 시대에 재당, 재일 신라 교류민들이 장보고 선단의 활동에 큰 도움이 된 것처럼. 현재 세계 각국에 살고 있는 한국계 거류민들은 장보고 시대를 다시 여는데 훌륭한 자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장보고처럼 이들을 결집할 수 있는 영도자의 출현이 없다는 것이다.

장보고 컬럼의 많은 부분은 서울시 강남구 무역회관 18층에 있는 ‘장보고 기념 사업회’부터 제공받은 자료에서 발췌했음을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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