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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시보기-나가사키현 I
보스톤코리아  2009-04-27, 15:45:10   
나가사키는 후쿠오카와 더불어 규슈의 서북부에 위치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인구는 44만 명으로 1571년 포르투갈에 개항한 다음에는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중국 과의 교역을 전담하던 일본의 유일한 관문이었다. 그래서 나가사키는 여러 외국의 이국정서가 넘치는 문화 도시로 발전해온 것이다.

일본 43개 현 중에서 해안선이 제일 길고 섬이 900개나 되는 현으로 많은 섬이 차지하는 면적이 육지 면적과 맞먹는 곳이며 경치가 아름다워서 국립공원이 2개에, 6개의 국정 공원이 있어 연중 관광객들이 넘쳐나는 곳이다.

나가사키 하면 의례 먼저 연상되는 것이 원자탄의 피폭으로 엄청난 인명이 살상되고 결과적으로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 것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실은 500 여년 전부터 나가사키는 일본 국내와 국외에 유명세를 치르고 있었다.

유럽의 여러나라에게 유일하게 개항한 항구로 유럽의 문물이 나가사키를 통하여 일본으로 수입되면서 기독교도 함께 나가사키로 전파되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최초로 기독교가 전파 포교 되고 교회가 처음으로 세워지고 최초의 순교자도 이곳에서 시작이 되는 것이다. 실로 나가사키의 기독교 역사는 일본의 기독교 역사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전국시대였던 1543년에 지금 일본의 우주 발사 기지가 있는 다네가시마 섬(種子島)에 3명의 포르투갈인들이 포류해 온 적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철포를 가지고 있었는데 도주(島主)였던 마사토기와 그의 16세 된 아들 도키타카는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철포의 명중률, 사정거리와 위력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는 2정의 총을 금 1 천량 (지금 돈 75만불) 이라는 거금을 주고 사서 대량으로 제조하게 된다.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로 쇼군의 지위가 땅에 떨어지고 힘있는 다이묘(大名)들이 약한 국가를 어우르는 약육강식 시대로 강자가 되기 위해서는 총을 많이 소유하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각 영주들은 경쟁적으로 서양무기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것을 제일 먼저 터득한 사람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로, 그는 조총의 위력을 발판으로 하여 일본을 거의 통일 하게 되는 것이다.

조총이 전래되고 나서 6년 후인 1549년에 예수회 소속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1506 - 1552) 가 규슈의 남단 가고시마에 상륙하여 처음으로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고, 1567년에는 루이스 데 알메이다가 나가사키에서 본격적으로 포교 활동을 시작하고 최초의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당시의 패자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권력이 커감에 따라 불교의 막강한 힘을 꺾기 위해 기리시탄 (당시의 그리스교도를 이렇게 불렀다) 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1,700 만 명의 일본인 중에 100만 명이 세례 교인이었다고 한다.

오다 노부나가는 1569년에 기독교 포교를 정식으로 공인하게 되는데 그의 속셈은 불교를 견제하고 포루투갈과 무역을 통해 재원을 확보하여 대포와 화약 구입을 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포르투갈은 유럽국가 중에서 가장 먼저 나가사키의 하라도섬(平戶島)에 상관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한 호감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는데 그 이유는 서양제국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과, 천황이라는 살아 있는 신이 있는데, 그리스도교의 또 하나의 하나님을 받드는 것이 일본의 통치 이념이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1597년 에는 선교사 6 명을 포함해서 26명을 나가사키의 니시자카(西坂) 언덕에서 참형에 처해 버렸다. 1614년 에는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기독교 금교령을 내려 신자들을 체포, 추방하여 순교를 당하게 하는데 20~30만 명의 순교자가 있었다고 한다.

나가사키에서는 성모 마리아와 예수의 상을 밟고 지나가게 하여 기독교인들을 색출하였다고 한다. 1637년에는 나가사키의 시마바라에서 기독교신도들이 영주들의 가혹한 천주교 탄압과 농민들에게 과해지는 무거운 세금에 반항하여 16세 밖에 안된 아마쿠사 시로우를 총대장으로 하여 폭동을 일으키지만 4개월 후에 에도 막부군에게 3만7천의 농민들이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살해 당하게 된다.

그 이후로는 모든 국민들은 의무적으로 불교 사원에 주민 등록을 하게 함으로 여행, 이사, 취직을 할 때 마다 절에서 증명서를 떼어야 하는 종문조사와 매년 예수와 마리아 상을 밟게 하여 기독교인들을 색출하는 후미에, 다섯 가정을 한 조로 하여 기독교인들을 색출하는 5인조 제도 등으로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200 년 이상 계속하게 된다.

1634년 기독교 금교령을 내린 에도 막부는 나가사키의 호상(豪商) 25명에게 돈을 내게 하여 나가사키 앞 바다에 데지마라는 4천 평 정도의 인공섬을 만들었다. 포루투갈 상인들을 조그만 섬에 격리 거주시켜서 그들과 무역은 하되 기독교의 전파를 막는 것이 이 섬을 만든 목적 이었다.

4년 후인 1637년에 데지마섬이 준공 되었지만 바로 그 때가 시마바라의 기독교인 반란을 진압한 때라서 에도 막부는 반란을 조종했다는 혐의로 포루투갈 선박을 일절 입항 금지 시키고 히라도에 있었던 네델란드 상관을 데지마섬으로 이동 시키면서 네델란드, 중국, 조선의 선박을 제외한 모든 국가의 선박에 대해서는 입항을 금지 시켰다. 유독 네델란드 선박만 입항을 허락한 이유는 그들은 기독교 전파에는 뜻이 없고 오직 돈벌기 위한 무역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데지마 섬에서 육지로 연결된 다리에는 검문소를 설치하여 네델란드 사람들이 육지에는 얼씬도 못하게 하였다. 일본인들도 출입허가증을 발급 받은 상인들만 출입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매춘을 목적으로 하는 창녀들에게만은 데지마섬을 자유롭게 드나들게 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에 나가사키의 인구가 12만이었는데 7천 명이 넘는 창녀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가 일본에서 처음으로 공창 제도를 시작하던 때였는데, 1589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교토의 야나기초(柳町)에 첫유곽을 만들었다. 이 유곽은 후에 시마바라(島原)로 이전했다.

당시 시마바라에는 버드나무와 꽃이 많았기 때문에 성매매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화류계라고 부르게 되었고 지금도 그대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1617년에는 에도(동경) 한복판에 요시와라(吉原) 유곽이 설립 공인 되었다. 시마바라와 요시와라 유곽은 오사카의 신마치(新町)와 함께 일본의 3대 유곽으로 알려져 왔다.

일본사람들은 3대 아름다운 호수는 후지코코, 비야코, 도와다코 호수로 3대 야경은 하코다테, 고베, 나가사키, 야경으로 3대를 아주 많이 사용하여 등급을 잘 메기는데 유곽까지 3대 유곽을 정해 놓고 있다. 나가사키 유곽의 규모가 다른 곳의 2배가 넘는데도 3대 유곽에서 빠진 이유는 나가사키 유곽이 백인 전용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1684년 에도막부의 8대장군 도꾸가와 요시무네 (1684-1751)가 쇼군이 되면서는 나가사키 항을 통하여 기독교와 무관한 서적의 수입을 허용하였고, 권위 있는 유학자들에게는 네델란드어를 배울 것을 명령하였다. 후일에 아편전쟁으로 중국이 허망하게 서양제국에게 무너지자 일본은 나가사키를 통해 근대전에 필수적인 보병, 기병, 포병술, 대포학 개론 등 국방에 필요한 서적을 많이 수입하여 미래에 닥칠 서양의 침입에 대한 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본은 조선과 똑같이 쇄국 주의를 고집했지만 나가사키의 데지마라는 눈꼽만한 섬을 통하여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대원군의 철저한 쇄국주의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1858년 미국의 페리제독에 의해 미일수호 조약이 체결되고 시모다(下田)와 하코다테(箱館) 두 항구가 개항 되면서 데지마의 네델란드 상관도 폐쇄되게 된다. 200여 년 넘게 서구를 향해 열린 유일한 항구로서의 역할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일본의 쇄국주의도 막을 내리게 된다.

1856년 프랑스인 신부가 26명의 천주교인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순교 당한 장소에 프랑스인들을 위한 오우라(大浦) 천주당을 세웠을 때 나가사키의 우라카미(浦上) 지구에 있던 10여 명의 일본인 크리스챤들이 성당으로 뛰쳐 들어온 사건이 있었다. 200년이 넘는 박해를 받으면서도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던 그들에게 전세계가 찬사를 보내고 있었지만 에도 막부는 아직도 기독교는 금교로 되어 있다고 그들을 처벌하였다.

수만 명이 순교를 당해도 끝까지 버텨온 나가사키의 기독교 역사였지만 지금은 기독교도 들의 숫자가 많지 않은 곳으로 변모해 버렸다. 왜? 일본은 한국보다 250년이나 앞서서 기독교가 전파된 나라다. 그러나 전체 인구의 0.8% 만이 기독교인이다.

그들은 기독교의 유일신에 얽매이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들이 모시는 신은 신사(神社)에 모신 그들의 조상이다. 자신들이 모시는 신이 800만이나 되기 때문에 한두 명의 신이 추가 된다고 해서 문제될 것도 집착할 것도 없다는 태도다.

불교에서 금기로 여기는 대처승 제도를 시작한 곳이 일본이다. 그들은 종교도 자기 식으로 편하게 변형해야만 만족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나라의 김교신, 함석헌, 안창호 선생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기독교 학자 우치무라 겐조 (內村鑑三: 1861~1930)는 기독교는 하나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이 중요한 것이지 교회는 필요 없다는 무교회 주의자다.

그는 두 개의 "J"즉 Japan 과 Jesus Christ를 섬긴다고 주장하였다. 자손이 태어나면 신사(神社)에 고하고 결혼식은 편의에 따라 신토식 이나 기독교식으로 치르고, 일상적인 생활은 유교의 규범에 따르지만 장례식은 불교식으로 치르는 나라가 일본이다. 그저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서 최상의 가치와 이익을 창출하면 그것이 원칙이고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홋카이도 개발에 큰 역할을 담당했던 William Clark 교수가 귀국길에 오를 때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고별사를 청하자 Clark 교수가 한 말이 "Boys be ambitious for the Christ" 였다. 즉 "주님을 위해 대망을 가집시다." 였는데 일본 사람들은 후일에 for the Christ 를 빼버리고 "Boys be ambitious" 즉 "청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로 바꿔 버렸다.

주님을 위하여가 자신을 위하여로 전혀 딴 뜻을 가진 말로 바뀐 것이다. 빼버린 이유인 즉 일본인들의 정서에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수십만 명이 순교를 당하면 서도 지켜온 나가사키의 기독교 열풍이 사라져 버린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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