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다시보기-나가사키 II
보스톤코리아  2009-05-04, 15:50:25 
1945년 8월 9일 오전에 미국의 최신예 폭격기 B29 한대가 북규슈(기타규슈) 시의 군수 산업기지인 고쿠라 (小倉) 상공을 수차례 선회 하고 있었다.

짙은 구름 때문에 목표지점을 확인 할 수 없었던 폭격기는 애당초 목표물이 아니었던 나가사키 (長崎) 의 상공에 뜬 구름이 걷히자 오전 11시2분에 뚱뚱보 (Fatman) 라는 원폭을 나가사키 상공에 투하하였다.

엄청난 섬광과 폭발로 한순간에 7만 4천명이 사망했고 7만5천명이 부상을 당했다. 1만 8천의 가옥이 파괴되고, 이재민이 12만이나 되었다. 아비규환의 생지옥이었다.

바로 이 시각에 폭심에서 겨우 700m거리에 있는 나가사키 대학병원 방사선과의 나가이 다카시(永井隆) 박사는 환자의 x-ray필름을 판독하고 있었다.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주위에서 함께 일하던 병원 직원들과 환자들이 순식간에 생명을 잃고 자신도 동맥이 파열되어 많은 출혈과 함께 의식을 잃기도 했지만 곧 계속 환자를 돌보아야 하는 의사의 직무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나가이 박사는 원자탄 피폭 전에 x-ray를 많이 쏘여서 이미 백혈병 환자로 진단을 받은 상태로 앞으로 수년 후면 사망한다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다. 이제는 피폭으로 원자병까지 덤으로 받게 된 것이다.

피폭3일 후에야 겨우 집으로 돌아 왔는데 그 때 그는 이미 아내가 죽었다는 것을 직감 했다고 한다. 그의 말로 부인은 오직 집안 일만 부지런히 하던 여자였다. 혹 자기의 논문이 학술지에 실리면 단정하게 꿇어 앉아 남편의 논문을 읽었다고 한다. 그녀에게 남편은 자신의 모든 것이었다.

학술지에 실린 글은 전문 용어투성이어서 아내가 읽어 보았자 이해 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불과 몇 페이지의 짧은 글이더라도 아내는 눈물마저 글썽이면서 읽어 가곤 했다. “그 곁에서 나는 젖 먹이를 어르면서 한동안 가슴속에서 뜨거운 샘물이 솟아 나는 것 같은 기분에 젖어 들곤 했다.”고 피폭 당시의 상황을 나가이 다카시 박사는 자신의 아내를 회상하는 “묵주알”(로사리오) 이라는 책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책의 줄거리를 간추려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연구실에서 오래 연구해왔던 방사선을 많이 쏘여 그만 백혈병에 걸려 버렸다. 살 수 있는 날이 몇 년 안 된다는 진단을 받은 날 나는 믿고 있던 아내에게 모든 걸 말하고 앞 일을 생각하라고 말했다. 그때 아내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내가 기대했던 대로 아내가 흔들리지 않아 우선 기뻤다. 8월 8일 아침 아내는 어느날처럼 생글생글 웃으며 출근하는 나를 보냈다. 조금 걸어가다 도시락을 잊어 버린 것 같아 다시 집에 돌아 왔다가 현관에 엎드려 우는 아내의 모습을 보았다. 이것으로 살아 있는 아내를 마지막으로 보게 된 것이다.

그날밤은 방공 당직으로 교실에 머물렀다. 다음날 8월9일 원자폭탄이 우리들 머리 위에 터뜨려 졌다. 나는 상처를 입었다. 곧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우리들은 환자 구호로 너무도 바빴다. 나도 5시간 뒤 출혈이 심해 쓰러졌다. 그때 나는 아내의 죽음을 직감하였다.

왜냐하면 아내가 끝내 내 앞에 나타나지 안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심한 부상을 입었을 망정 생명이 붙어 있는 한 1km거리의 집에서는 기어서라도 꼭 내 안부를 확인하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피폭3일째가 되어 나는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부엌이 있을 자리에 보이는 검은 덩어리를 나는 곧 알아 봤다. 단지 한줌의 재와 타다 남은 아내의 골반과 요추였다. 팔목뼈로 짐작되는 곳에 구슬은 모두 녹아 버렸지만 십자가가 달린 쇠줄이 남아 있었다.

바로 아내가 기도할 때 사용하던 묵주임을 알 수 있었다. 화로 그릇에 아내를 수습했다. 아직도 따뜻했다. 나는 그것을 가슴에 안고 묘지로 갔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죽어서 석양이 비치는 길 위에 점점이 검은 뼈를 남기고 있었다. 내 뼈를 머지 않아 아내가 안고갈 예정이었는데, 운명은 모를 일이다.

내 가슴 속에서 아내가 바싹바싹 인산 석회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그 소리가 “미안해요, 미안해요” 라는 말로 들리었다. 나는 하나님에게 “제게 가장 소중하신 하나님, 아내가 기도하면서 죽을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 하였다.

이상이 먼저 죽은 아내를 회상하면서 쓴 “묵주알” 의 내용이다. 다행한 것은 10살난 아들과 4살 된 딸은 피란을 보냈기 때문에 피폭에서 안전한 것이었다. 그는 백혈병에 원자병까지 겹친 데다 아내까지 먼저 보냈지만 두 아이를 돌보면서 정성껏 환자를 치료하는 데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성격을 가진 그가 이제는 피폭자들의 보호자 이면서 대변인 노릇까지 하게 되었다.

폐혀가 된 집터에 여기당(如己堂) 이라는 다다미 2장이 겨우 들어갈 만한 아주 작은 집을 짓고서 집필 작업에 몰두하게 되었다. 여기당은 여기애인(如己愛人) 을 뜻하는 말로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하라” 는 뜻이다.

그는 사망하는 1951년 5월 1일까지 무려 14권의 책을 저술하게 된다. 그가 처음 쓴 “나가사키의 종” 은 평화를 갈망하는 나가이 박사의 첫소설 제목으로 원폭으로 파괴된 우라카미(浦上) 성당의 안제라스 종(鐘)을 모델로 하여 폐허가 된 도시의 참상을 통하여 원폭의 처참한 비극을 강력히 경고하고 있는 책으로 전세계에 크나큰 반향을 일으켜 8개 국어로 번역되어 공전의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영화 연극 가요로 제작되어 세계 전역에 감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지금도 나가사키의 종은 매일매일 세 번씩 울리면서 원폭의 무서움을 상기 시키고 희생자의 명복을 빌고 있다.

나가이 박사는 말년에 백혈병이 도져서 바른쪽 팔이 골절 되었을 때 주위에서 병든 아버지와 좁은 방에서 함께 지내는 남매가 불쌍해서 딸을 양녀로 보내라는 권유를 듣고는 “나는 두 아이에게 남겨줄 유산이 없습니다. 나마저 죽고 나면 두 아이가 얼마나 부모를 그리워 하겠습니까? 나는 아이들에게 이 그리움을 아름답게 남겨 주고 싶습니다. 부모에 대한 그리움은 일생 지닐 수 있는 보물입니다. 그런 것을 몇 년을 참지 못하고 버린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라고 말했다.

그가 집필한 “사랑하는 아이들을 남겨두고” 에서 그는 시시 각각 닥쳐오는 죽음의 순간 순간 속에서도 세상에 남겨진 아이들에게 희망과, 지혜와 용기를 심어주려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을 실어주고 있다. 이 책에서 그가 남긴 최상의 유언은 여기애인(如己愛人), 즉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하라”였다. 지금도 그의 뜻을 받드는 여기회(如己會) 라는 “남사랑회” 가 일본은 물론 한국에도 설립 되어 있다.

그의 딸 쯔쯔이 가야노는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남에게는 좋은 것을 주어라, 혹시 네가 그것이 필요하다면 하나님께서 너에게 그것을 채워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나눔의 사랑을 실천하며 세계 평화를 호소하며 살아간 아버지를 추억하는 일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라고 하며 아버지에 대한 아름다운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가이 박사의 아들 마코토(永井誠一) 는 아버지의 헌신적인 삶을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과 함께 엮어 “나가사키의 종은 미소 짓는다(부제: 오누이의 기록)”라는 책을 남기고 있다. 짧은 내용을 소개한다..

나가이 박사가 병석에 있을 때 학교에서 아들이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아 걱정하고 있었다. 이윽고 아들이 집에 돌아와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학교 급식으로 나온 파인애플 주스를 아버지께 드렸다. “아버지 드세요, 흘릴까 봐 천천히 걸어 왔는데 그래도 조금 흘렸어요.” 아들이 마시지 않고 가져온 주스는 두 모금도 안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눈물 겨운 사랑을 보여 주고 있다. 나가이 박사는 말년에 생사의 갈림길 에서도 목숨을 부지 시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사랑, 관심, 감사 세 가지는 나가이 박사의 생활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똑같이 원폭이 투하 되었는데 히로시마는 분노가 가득찬 도시로, 나가사키는 기도하는 도시로 변했다고 한다. 기도하는 도시로 변한 뒤켠에 나가이 박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49년 일본 국회는 그를 “국민영웅”으로 추대하였다. 또 교황은 길로이 추기경을 특사로 파견하여 그를 문병하였다. 패전 후의 일본인들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용기와 희망을 안겨준 그를 위해 천황이 직접 그의 병상을 찾아 문병하기도 하였다.

나가사키 시는 그에게 최초의 “명예시민” 칭호를 바쳤다. 헬렌 켈러가 그를 문병 왔을 때 그가 실토한 말이 있다. “몸소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연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고통 받는 사람을 위로 할 수 없다. 죽는 사람의 속을 알지 못하면서 그가 살아 있다는 기쁨을 만끽하도록 도와 줄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덧붙여서 의사가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서는 “의사의 의료 행위를 단순히 의료 기술상의 문제로만 생각한다면 마치 의사를 신체수선공 정도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의사란 환자가 몸과 마음으로 겪는 모든 고통을 온몸으로 함께 겪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이야기는 60여년 전에 훌륭하게 일생을 마감한 어느 의사의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삶의 지표를 지적 해준 선각자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기억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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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한 칼럼니스트    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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