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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한 컬럼 [마지막회]
보스톤코리아  2009-08-03, 16:49:46   
구마모토 성

일본에는 3대 명성이있다. 오사카성(大阪城) 나고야성(名古屋城) 그리고 구마모토성(態本城)인데 혹자는 히메지성(姬路城) 을 추가하기도 한다.

이 네 개의 성 중 구마모토성과 나고야성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 장수로 우리 귀에 익숙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축성한 성들이다. 가토는 축성의 대가였다. 에도막부의 본거지인 에도성도 그가 쌓았고 임진란 때 울산 부근의 서생포 왜성, 울산 왜성도 그가 쌓은 성이다.

정유재란때 울산성 싸움에서는 조명 연합군에게 포위 되어 식수와 식량이 없어서 흙을 씹고 군마를 잡아 먹어 가면서 구사일생으로 일본까지 도망쳐온 아픈 기억이 있어 그의 본거지인 구마모토 성을 축성할때는 그에대한 대비책을 면밀히 마련 한 것이 엿보인다.

구마모토성은 총면적 98만 제곱 미터에 성둘레가 9km로 49개의 성루와 29개의 성문을 갖춘 웅장한 규모의 성으로, 성을 둘러싼 넓은 해자의 축대만 해도 일반 성의 성벽만큼 높은 것이었다. 식수공급을 위해서 성 안에 있는 우물만 해도 120개나 된다. 은행나무가 수 없이 많고, 방에 까는 다다미 속을 고구마 줄기로 채워서 유사시에는 식량 대용으로 쓸 수 있게 하였다.

울산성에서는 성벽이 침수되어 무너진 적이 있어서 물이 잘 빠지도록 돌틈에 배수관이 설치되어있다. 성문에서 천수각으로 접근하는 길은 직선도로가 하나도 없이 양쪽에 성벽을 끼고 돌아 들게 되어있어 적병들이 접근 하기가 용이하지 않게 되어 있다. 성벽은 아래쪽은 완만한 경사지만 중간 부분은 안쪽으로 휘어지다가 올라갈수록 밖깥 쪽으로 튀어 나오도록 되어 있어 누구도 성벽을 기어 오르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구마모토의 성벽은 무샤 가에시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성벽의 윗부분이 밖으로 휘어지게 만든 기술은 조선에서 배운 것으로 당시에 성벽의 상단부는 조선에서 끌어온 석공들이 쌓았다고 한다.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철옹성은 구마모토성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것을 1877년에 일어난 세이난(西南) 전쟁에서 증명하고 있다.

세이난 전쟁은 명치유신의 공신으로 조선 정벌을 계속 주장하다가 _겨난 사쓰마(지금의 가고시마)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불만세력에 추대되어 일으킨 반란 전쟁으로 소수의 정부군이 버티고 있던 구마모토성을 50일간 맹공을 퍼부었지만 함락 시킬 수가 없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전쟁에 지고 나서 우리는 관군에게 진 것이 아니고 구마모토성을 쌓은 세이쇼(가등청정)공에게 진것이라고 공언하였다. 웅장한 모습의 천수각은 세이난 전쟁 때 불타 버려서 다시 복원한 것인데 까마귀처럼 검은 색깔이라서 구마모토성을 가라스초(까마귀성)라고도 부른다. 천수각 바로 뒤켠에는 조금 작은 크기의 또 하나의 천수각이 있는데 천수각으로 부르지 않고 급을 내려서 우토 성루(宇土櫓)로 부르고 있다. 이 성루는 가등청정의 숙적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영주로 있었던 우토성의 천수각이었다.

소서행장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꾸가와 이에야쓰에게 대항하다가 패전 장수가 되자 도꾸가와 편이었던 가토가 전리품으로 우토성의 천수각을 통째로 자기의 천수각 옆에 세워놓고 우토성루라고 격하 시켜서 불렀던 것이다.

두 사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팔 노릇을 해온 사이지만 사사 건건 대립해서 앙숙 관계에 있었다. 임진 왜란 말기에 전세가 교착 상태에 빠지자 명나라의 심유경과 소서행장 사이에 화의가 진행 되고 있었다. 자신을 제외시키고 진행되는 회담에 불만이 가득한 가토의 심중을 파악한 사명당 대사가 가토의 진영을 3번씩이나 찾아가서 왜군의 허실을 탐지하게 되었다. 그때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필담이 전해지고 있다.

가토: 절에 보물이 있는가?
사명당:중한테 무슨 보물이 있겠는가? 다만 너의 머리가 보배로다.
가토: 무슨 뜻인가?
사명당: 우리나라에서는 1천 근의 황금과 1만 호의 식읍을 현상으로 내걸고 당신의 머리를 구하니 보배가 아니고 무엇이겠나”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에 관한 일화는 수없이 많다. 왜군이 한양성에 들어올 때 가등청정은 굳이 숭례문을 통하여 제일 먼저 들어올 것을 고집했었다. 숭례문은 국빈을 맞아 드리는 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외향적인 성격과 돌출적 행동 때문에 조선사람들에게 제일 미운 놈이 가등청정이었다.

북한의 통일신보는 1960년대에 가수 김상국 씨가 불러서 공전의 히트송이 되었던 경상도 민요 “쾌지나 칭칭 나네” 가 가등청정으로 인해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임진왜란 말기에 패퇴해서 쫓겨가는 왜적들을 보고 우리 병사들이 “쾌재라(좋구나), 청정이 쫓겨 나가네” 라며 환호한 것이 부르기 좋게 변형 되어 “쾌지나 칭칭 나네”로 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임동권 씨의 한국 민요집에서도 진주지방에서 가등청정을 몰아내는 내용을 담은 “쾌지나 칭칭나네”의 수록본이 있다. 이 노래에서 보는 것처럼 가등청정은 왜군의 대명사처럼 일컬어지고 있다.

전라도에서도 임진왜란 때 생겨난 민요가 있는데 바로 강강수월래(强羌水越來)로 적들이 물 건너에서 쳐들어 오니 경계하라는 소리다.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 대치할 때 수병들의 숫자가 많은 것 처럼 보이게 하려고 부녀자들을 남장 시켜서 떼지어 노래를 부르게 하자 왜군들이 이순신의 군사가 많은 줄 알고 달아나 버린 것에서 유래한다.


<한번 배반한 사람은 두번 배반한다>

도꾸가와가 가등청정을 두고 한 말이다. 가등청정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6촌 간의 친척으로 똑같이 아이치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히데요시의 시동으로 지내면서 많은 전투에 참가해 전공을 세운 공로로 히데요시는 그를 양자로까지 삼으면서 구마모토의 영주로 임명했을 뿐만 아니라 임진 왜란 때는 소서행장과 함께 1군, 2군의 장수로 조선을 침공하는 중책을 맡기기까지 했었다. 히데요시가 죽고 그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권을 승계하자 대권을 노리고 있던 도꾸가와 이에야쓰가 영주들을 규합하여 세키가하라에서 히데요시와 운명을 건 세기의 결전을 벌이게 된다.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형세에서 소서행장은 끝까지 주군의 아들인 히데요시를 위하여 싸웠지만 가등청정은 예상을 뒤엎고 도꾸가와 편에 서서 힘의 저울추를 도꾸가와 쪽으로 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덕택으로 도꾸가와가 승리를 거두어 도꾸가와 막부를 시작하게 된다.

끝까지 절개를 지킨 소서행장은 참수형을 당하지만, 가등청정은 도꾸가와의 양녀와 결혼까지 하면서 소서행장의 영지까지 차지했고 구마모토의 큰 영주가 되었다. 그러나 도꾸가와 쪽에서는 언젠가는 그가 다시 배반할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가등청정이 죽고 그의 아들 가토 타다히로가 대를 이었지만 도꾸가와 막부는 그를 제거하고 오이타의 번주 호소가와 다다도시를 구마모토의 영주로 삼게 된다. 조선사람들을 수없이 죽이고 납치해간 가등청정의 집안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집안처럼 2대를 넘기지 못하고 망해 버린 것이다. 죄를 지은 자는 당대에 속죄를 못하면 후대에 라도 벌을 받게 마련이다.


그동안 애독 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편집후기>

우리는 흔히 일본을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한다. 현해탄 건너에 있는 가까운 나라지만 태평양 반대편에 멀리 떨어져 있는 미국보다도 일본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한일 간의 역사는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의 연속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일본은 가해자였다. 한국은 피해자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반일(反日)이라는 국민감정을 넘어서 일본에 대한 이해의 폭을 좁히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이웃으로 살면서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이 항상 나쁜 관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500여년 전에 백제가 멸망하기 전까지는 두 나라 사이에 사회, 문화, 종교는 물론이고 국가 수반인 왕까지 공유하며 지냈던 때가 있었다. 일본 사람들은 백제를 조상의 나라라고 불렀다. 백제의 멸망으로 일본은 홀로 서기를 시작했고 그들에게 한반도는 정복해야 할 땅, 미움의 고향이 돼 버렸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하는 것이다. 원래 백제라는 한 뿌리에서 자라난 두 나라 문화를 함께 가꾸려는 상생의 노력이 한일 정부는 물론이고 민간 단체에까지 파급 된다면 새로운 국면의 긍정적인 국가 관계를 창출할 수 있다고 믿는 바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도 일본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 가시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번 규슈 컬럼에서는 기행문의 테두리를 넘어서 고대 한일 두 나라 간의 관계를 조명하는 데 신경을 많이 쓴 것도 사실이다. 때로는 지루한 역사 이야기였지만 소견을 개진하고 애독해 주신 독자들께 감사함을 지면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수많은 자료를 제공해 주신 ‘장보고 기념사업회’와 서태구 선생님께 감사 드리고 난필을 교정해 주고 다듬어 주신 장명술 편집장님, 김수연, 김현천 기자님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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