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흥망과 발해국의 태조 대조영 31
보스톤코리아  2009-12-14, 16:12:31 
전번의 글에는 오자가 많았고 또 글이 고르지 못해서 이해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다. 더욱 죄송한 것은 그 제목이 <신라와 발해의 남북국 시대 (2)>가 되어야 하는데 <글안의 이진충의 반란과 대조영의 거사>로 잘못 되어 있어 혼란스럽게 되었다.

그리고 글 중에 “도독”은 “도덕적”의 오기이므로 이 기회에 그 제목과 함께 잘못을 정정하고 넘어가야 하겠다.
필자는 전장에서 그 제목을 “신라와 발해의 남북국 시대” 라고 하였다. 그것은 당시의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지금의 남북한 상황과 흡사한 면을 많이 보여 주고 있을뿐만 아니라 당시 신라는 발해를 북국이라고 호칭했기 때문에 그렇게 제목을 부쳐본 것이다.

이제 결론에 앞서 남북국 시대의 사정을 간단히 살펴보고 넘어가기로 하자.
발해는 제 2대 무왕 이래 30여 차례에 걸쳐서 일본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돈독히 하면서도 남쪽의 신라에 대하여는 단 두번의 사신이 있었을 뿐이다.

그것도 발해가 신라에 사신을 보냈던 것이 아니고 신라가 발해에 사신을 보냈던 것인데 신라가 왜 발해에 사신을 보냈던 것인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없다. 어쨌든 위와 같은 사실에 비추어볼 때, 신라와 발해의 남북 관계는 애초부터 탐탁치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일본과 신라와의 관계도 별로 좋지가 않았다.

그것은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관계에 있었고, 일본이 당나라에 사신이나 유학생을 파견할 때, 신라의 선박을 이용하여 보냈던 것이다. 그래서 자존심이 상했을 뿐만 아니라, 신라가 삼국통일 후 그 국력을 과시하면서 강국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어 한편 밉기도 하고 비굴하게까지 생각되어 적대감정을 가졌던 것이다.

일본의 고겐천황 (考謙天皇)의 대신 후지하라 나까마로 (藤原鹿呂)가 서기 759년 발해와 동맹하여 신라를 치자고 제의했던 일이 있다. 그것은 중국의 당나라가 “안사의 난”으로 궁지에 몰려 있을 때 신라를 공격하자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발해의 문왕은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지하라의 신라 공격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일본의 신라 공격 계획은 전적으로 고겐 (考謙) 천황과 준닌 (順仁) 천황, 그리고 쇼도구 (稱德) 천황 간의 왕위 계승 문제로 발생한 내분을 외부로 돌리려는 심산에서 계획된 일이었다.

그러나 후지하라는 고겐천황의 왕위계승 문제에 실패하자 서기 774년에 반란을 일으킨다. 반란에서 패배하자 그는 자살하고 만다. 그런데 발해는 그 후도 일본과의 관계를 긴밀히 하면서 사신교환이 번번히 있었다. 그러나 동족인 신라에 대하여는 항상 적개심을 늦추지 않았던 것이다.

이조 정조 때의 규장각 검서관 유득공은 그의 저 “발해고” 에서 말하기를 “남정신라 북략제부대개경우” (南定新羅北略諸部大開境宇)라고 하여 발해가 신라를 정벌했다고 지적하였다.

이 같은 기록에 따라서 중국의 사학자 왕용은 “대인수 (大仁秀)” 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발해국의 대인수 왕은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고 북쪽으로 여러 부족을 공략하여 그 강력을 크게 넓혔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 말하기를 발해는 신라를 평정하기 위하여 전쟁을 도발하였는데 그 결과는 신라가 패하고 발해가 승리하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발해사연구, 제3집 P.332-338 참조).

그러나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서는 그같은 일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 무렵 인제 41대 경덕왕 (景德王) 13년(821)에 진주도독 현창(憲昌)이 반란을 일으켜 관군을 보내 평정하였다는 기사와, 그에 앞선 헌덕왕 11년 (819)에는 당나라의 윤주(산동성) 절도사 이사도 (李師道)가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 현종은 그를 토벌하기 위해서 신라에 원군을 청했다.

현덕왕은 춘천장군 김응원에게 정예군사 3만 명을 주어 당나라에 파견, 이사도의 반란을 평정케 했다는 기사가 보일뿐이다.

아마도 이 시기에 발해의 대인수왕이 신라를 공격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러나 발해사의 연구에 있어서 기본사료가 되고 있는 “신당서”와 “구당서” 의 발해전에는 발해가 신라를 공격했다는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인수파 능토 해북 제주 개대경우”(仁秀頗能討海北諸州開大境宇)이라고 하여 “발해의 대인수왕은 해북(흑용강 북쪽)의 여러부족을 토벌하고 그 영역을 크게 개척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특히 주목되는 것이 일본의 당나라 유학생 자각대사 원인 (慈覺大師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소개된 신라와 발해국의 전쟁에 대한 말이다.

자각대사 원인은 서기 838년부터 847년까지 9 년간에 걸쳐 당나라에 유학하였는데 그는 서기 838년에 신라의 장보고가 중국의 산동성 적산에 세운 법화원 (法華院) 에 의탁하여 1년간 신세를 진 일이 있다.

그 때 그가 그곳의 신라인과 승려들로부터 얻어들은 음력 8월 15일이 경축행사에 대한 얘기이다.
원인의 말에 의하면 서기 838년 8월15일에 사원 (적산법화원)에서는 떡과 각종음식을 잔뜩 차려놓고 명절이라고 하면서 지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8월 15일의 명절은 아직 다른 나라에는 없고 유독 신라에서만 지키고 있는 명절이라고 했다.

원인은 이어 말하기를 그곳 노승들의 말에 의하면 “신라가 그 옛날 발해와 싸웠는데 이 날에 승리하여 그것을 경축하는 뜻에서 8월15일을 명절로 정하여 대대로 지켜온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곳 신라인들은 이날에 백종의 음식을 차려놓고 가무와 관현악으로 즐기면서 3일간 계속 논다고 하였다. 지금 법화원에서도 고국을 추모하면서 이 8월 15일을 추수감사의 뜻이 아니라 발해국과 싸워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경축일로 즐기고 있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일본의 자각대사 원인이 전하는 8월 15일의 경축행사에 대한 말은 매우 진실성이 있어 보이며 그것은 시기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볼 때 매우 귀중한 사실을 전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실제로 발해국의 대인수왕은 옛 고구려의 도성인 평양성을 탈환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신라에 대하여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신라군의 완강한 반격으로 평양성의 탈환에 실패하고 허탈하게 퇴각하고 말았다.

이 때 신라군은 압록강을 건너 북쪽으로 더 진격하지 않고 대동강 유역의 경계를 방어하는 것으로 끝쳤기 때문에 전쟁은 더 확대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쌍방 어느편에서도 상대방을 공멸치 못하고 승리없이 전쟁이 끝나고 말았다.

그것은 마치 해방 후 북한의 김일성이 무력으로 남북을 통일하려고 6.25전쟁을 도발하였다가 막대한 인명의 손실과 재산의 피해만 남기고 말았던 것과 같은 형상이었다. 그런데 서기 834년 당나라의 장건장 (張建章)이 사신으로 발해에 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와서 발해국기(渤海國記)를 지어 바쳤는데 거기에는 발해와 신라가 싸웠다는 전쟁에 대한 기사는 없었던 것 같다.

다만 서기 826년 신라가 북쪽의 경계를 위하여 패강 3백리에 장성을 쌓았다는 기록만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것을 인용한 신당서는 발해가 신라를 정벌했다는 기록을 남기지 못한 것 같다.

어쨌든 그 후 신라는 북극 발해의 침공에 대비하여 헌덕왕은 그 18년 (826)에 우령 (황해도의 우봉) 태수 백영( 白永 )에게 명하여 한산 이북의 여러군의 군민 1만 명을 징발하여 패강(대동강) 유역의 3백리에 장성을 쌓게 했다.

“삼국사기” 의 신라본기는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해 주고 있다. 명우령 태수 패영(백영의 오기임) 정택 한북 제주 군민 1만, 축 패강 장서 삼백리 (征擇漢北諸州郡民一万築浿江長서三百里).

그것은 마치 6.25 전쟁 이후 북한의 남침에 대비하여 38도선, 일명 휴전선의 155마일에 넓이 4km의 완충지대에 철조망을 둘러친 것이나 다름없는 방어책이었다.

그리하여 발해는 남쪽으로 그 경계를 지금의 평안북도 함경남도의 개마고원을 그 경계로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대인수 왕은 오래전부터 숙적이었던 북쪽의 흑수말갈을 완전히 정복하고 그 지역을 통합하여 지금의 우수리 강 흥개호 이북과 그리고 흑용강 넘어 지금의 시베리아 연해주까지 그 영역을 넓혀 해동성국으로서 그 위세를 떨쳤다.

백릭 (한미 역사 문제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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