景 福 宮 : 경복궁에 깃든 우리 역사 2
보스톤코리아  2010-03-08, 12:22:34 
창덕궁의 정전 인정전
창덕궁의 정전 인정전
경희궁의 정전 숭정전
경희궁의 정전 숭정전
 
유일하게 한국에만 있는 종묘
유일하게 한국에만 있는 종묘
 

예전에는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요즈음의 한국은 일년이 다르게 면모를 달리하고 있다. 특히 고궁 (古宮)이나 문화유적, 문화재의 발굴과 보존, 복원은 지방 자치 단체에서 경쟁적으로 중점을 두고 추진하는 사업이 되었다. 그만큼 역사 유적 볼거리가 많아진 것이다.

경복궁이나 창덕궁, 종묘의 경우는 한국을 찾아오는 외국인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안내도 영어,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그룹으로 나누어서 하고 있는데, 외국어 사용 그룹 관람객들이 한국어 사용 관람객들과 거의 비슷한 숫자로 관람하고 있다.

특히 경복궁과 종묘의 경우는 일본과 중국 관람객들이 몰려 들고 있다. 아시아와 유럽 여러나라에는 모두 예전에 왕이 살던 궁궐이 있기 마련이다. 티벳의 포탈라궁, 일본의 황궁, 러시아의 크렘린궁, 영국의 원저궁과 버킹검궁, 프랑스의 엘리제궁에는 왕이나 수상이 살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궁궐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그래서 우리의 궁궐은 특별하게 고궁(古宮) 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서울에는 5개의 고궁이 있다. 이태조와 태종이 건축했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리고 고종황제 때 중건한 조선조의 법궁 (法宮)인 경복궁, 임진왜란 전에는 이궁 (離宮)이었지만 선조때부터 고종황제때까지 조선의 법궁이었던 창덕궁, 성종 때 궁궐의 어른들을 모시기 위해 건축한 창경궁, 월산대군의 개인집이었지만 선조가 잠시 궁궐로 사용했던 경운궁(덕수궁),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때 건축한 경희궁, 그래서 모두 5궁이 있다.

그런데 한국 문화재국에서는 경희궁을 5궁에서 빼고 종묘를 5궁에 넣고 있다. 종묘는 물론 왕이 살던 곳이 아니다. 왕을 사후에 모시는 사당이다. 그런데도 5궁에 넣고 있는 이유는 종묘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5궁 중에 으뜸은 역시 법궁 (法宮)이었던 경복궁의 차지가 될 것이다. 태조 4년인 1395년에 궁궐을 완성하고 큰 잔치를 열면서 정도전에게 궁궐의 이름을 짓도록 하였다. 정도전은 중국의 시경(詩經) 주아(周兒)의 한구절인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불렀으니 군자 만년에 큰 복이 있으리라”(旣醉以酒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경복(景福)을 취해 경복궁이라고 이름 지었다.

태조때 창건된 경복궁의 크기는 지금 정도로 755칸정도였는데 세종대왕 때 여러 곳을 증축하고 신축해서 큰 궁성이 되었다. 선조때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모두 불에 타버려 고종황제 때까지 법궁의 지위를 창덕궁에게 물려주었다가 고종황제 2년(1865)에 신정왕후의 발의와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3년 후인 1868년에 7225칸의 건물이 준공 되었다.

1910년 일제 강점후 일제는 의도적으로 조선의 상징인 경복궁을 훼손하기 시작하였다. 총독부 청사를 세우면서 광화문을 이전하고 흥례문을 철거했고, 창덕궁에 큰 불이 났을 때는 이를 재건 한다는 구실로 임금과 왕비의 침전인 강년전과 교태전을 철거해 창덕궁으로 옮겨 버렸다.

1932년에는 역대왕의 어진(왕을 그린 그림이나 사진)을 모시던 서원전을 이토 히로부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운 박문사를 짓는데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1995년에 조선 총독부 건물을 철거 하면서 우리 역사 찾기의 일환으로 경복궁 복원 사업을 시작해서 지금은 14개의 전각을 갖춘 궁궐의 모습을 찾아 가고 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경복궁을 바라보면 뒷편에 주산(主山)인 북악산(백악산)이 높이 솟아 있고 서쪽에 우람한 인왕산이 보이지만 좌청룡인 낙산은 높이 솟은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좌묘우사(左廟友社)의 원칙에 따라 종묘(宗廟)는 왼쪽(동쪽)에 위치하고 사직단(社稷壇)은 오른쪽(서쪽)에 배치하고 있다. 그래서 종묘는 동쪽으로 단성사와 창덕궁 사이에 있고,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 에게 제사 드리는 사직단은 사직터널 조금 못미친 지점에 있다.

정부 관청으로는 궁궐에 들어와 있는 관서인 궐내각사(闕內各司)와 육조(六朝)를 비롯해서 궁궐 밖에 있는 궐외각사(闕外各司)로 크게 나뉘는데 궐외각사는 지금 세종로 입구인 교보문고에서부터 경복궁 입구에까지 길 양쪽 (당시에는 六朝, 또는 주작로라고 불렀음)에 걸쳐 있었다. 그래서 경복궁의 영역은 지금의 교보문고가 있는 지점부터라고 해야 맞는 말이다.

궐내각사는 비서실격인 승정원, 서적편찬을 맡았던 홍문관, 의료기관인 내의원, 궁궐의 수비를 맡던 오위 도총부, 금군삼청, 왕조실록의 기록을 담당하던 춘추관, 의복을 담당하는 상의원, 옥새와 마패등을 관리하던 상서원 한글탄생의 고향인 집현전 등이 경복궁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들의 출입문은 서문(西門)인 영추문(迎秋門)이었다.

궐외각사는 세종로 좌우편에 줄지어 있었는데 동편에는 지금의 교보문고 자리에서부터 기로소 (耆老所)가 있고 경복궁 쪽으로 가면서 호조, 한성부, 이조가 있고 맨 끝에는 최고 권력기관으로 영의정을 비롯한 좌의정, 우의정이 있는 의정부가 제일 끝에 자리잡고 있다.

기로소는 조선시대에 나이가 많은 문신(文臣)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로 이곳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70세 이상된 문신으로 정 2품 이상의 관직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기로소가 하는 일은 임금의 탄일, 설, 동지 그리고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왕이 행차할 때 모여서 하례 (賀禮)를 행하거나 중요한 국사를 논의할 때 왕의 자문에 응하는 것이다.

왕도 6순이 되면 기로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되는데 여기 들어온 왕으로는 태조, 숙종, 영조, 고종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선의 왕들은 격무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에 장수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비록 기로소의 위치가 맨끝에 자리잡고 있지만 실제 권력 서열로 따지면 의정부에 못지 않는 높은 위치에 있었다고 하겠다. 세종회관이 있는 서쪽의 궐외각사로는 끝에서부터 장례원(노비관장), 사역원(외국어 대학), 공조, 형조, 병조, 사헌부, 예조 순서로 있었다.

사헌부가 육조(六朝)에 속한 기관도 아니면서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은 중앙과 지방의 행정을 감찰하고 관리를 규찰하며 풍속을 바로잡고 사건을 심리하며 탄핵을 주관하고 종친과 문무 백관을 규탄함은 물론이고 국왕에 대해서도 언제나 극간하는 것을 본령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에서 사헌부의 역할은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사헌부는 지금으로 치면 감사원, 안기부, 검찰청 등을 합친 역할을 하는 기관인데 사헌부 앞에는 돌로 만든 해태상이 있어서 이 앞에 오면 왕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야만 했었다.

해태는 중국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상상의 동물이다. 본래 뿔이 하나 달려 있는 충직한 동물로 사람들이 다툴 때는 바르지 못한 사람을 골라 들이받고 물어 버리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고사에서는 중국의 우(寓) 임금때 옥사를 담당했던 관리가 해태를 사용해서 잘잘못을 가렸다고 한다. 지금은 해태가 있는 위치가 사헌부 자리가 아니고 광화문의 좌우에 위치하고 있다. 예전 같으면 누가 감히 해태 앞에서 말을 탈 수 있겠는가? 지금은 그 앞으로 차들이 쏜살같이 내빼고 있다. 사람들 눈에는 해태의 부릅뜬 눈이 전혀 보이지 않는가 보다. 예전처럼 눈을 부릅뜨고 대한민국의 시비곡직을 가려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더도 말고 광화문 네거리에서 활개치는 폭력 데모꾼들을 몰아내 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예전에는 해태를 해치라고도 불렀다. 그래서 사헌부 관리들을 치관이라고 불렀으며 해태가 장식된 모자를 쓰고 다녔다. 원래 문관은 조복의 가슴과 등에 학을 수놓은 문양의 옷을 입었고 무관은 호랑이를 수놓은 조복을 입었는데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은 유별나게 해태를 수놓은 조복을 입었던 것이다.

사헌부에는 야다시(夜茶時)라는 모임이 있었다. 말그대로 “밤중에 차마시는 모임” 이지만 이것이 아주 특별한 모임이다. 탐관 오리를 처벌하기 위해 야밤중에 특별하게 모여서 의논하는 모임이다. 범인의 죄상을 나무판에 적어 범죄인의 대문에 걸어놓고 대문을 가시 덩굴로 막아 버리는데 이것을 “야다시”를 당했다고 한다. 이럴 경우에는 관직을 사퇴하는 것이 대부분 이었다고 한다. 또 죄가 중할 경우에는 대문으로 드나들지 못하고 담을 헐고 드나드는 파장(破墻) 곤욕을 당했다고 한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과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에는 신문고(申聞鼓)라는 큰 북을 가설하여 민원과 관리의 횡포를 고발하게 하였는데 그 직소가 이유가 있다고 판단되면 역시 사헌부로 하여금 해결토록 하였다. 그러나 신문고로 해결하는 사건은 역모 사건, 살인, 친자확인 정실과 첩을 구분하고 양민인지 천민인지 확인하는것으로 제한 되어 있어서 관리의 오직으로 신문고를 쳐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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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한 칼럼니스트    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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