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에 깃든 우리 역사 5 : <궐내각사와 근정전>
보스톤코리아  2010-04-05, 11:50:37 
근정전과 박석을 깔아 놓은 조정(朝廷).
근정전과 박석을 깔아 놓은 조정(朝廷).
 
줄행랑: 근정전쪽의 주춧돌은 동그랗고 바깥쪽은 네모지다.
줄행랑: 근정전쪽의 주춧돌은 동그랗고 바깥쪽은 네모지다.
 
근정문, 오른쪽에 일화문, 왼쪽에 월화문이 보인다.
근정문, 오른쪽에 일화문, 왼쪽에 월화문이 보인다.
 
서울시 방이동에 있는 한성 백제 중기의 원형무덤.
서울시 방이동에 있는 한성 백제 중기의 원형무덤.
 
영제교를 지나면 근정문에 이르기 전에 왼쪽에 유화문(維和門)과 기별청이 보인다.
유화문은 궐내각사에서 근정전에 이르는 문으로 이 문 서쪽으로는 궐내각사 지역인데 물시계를 설치해 시간을 알려주던 보루각, 왕명을 받는 승지들이 근무하는 승정원, 서적과 문서를 관리하고 왕의 자문을 맡은 홍문관, 역사 기록을 맡은 춘추관, 왕의 글을 관리하는 예문관, 왕의 옥새를 관리하고 관리들에게 마패를 지급하는 상서원, 음식 재료를 관리하는 사옹원, 건강을 맡은 내의원, 내시들이 근무하는 내반원, 의복을 관리하는 상의원, 관상감, 내사복시, 전설사, 전연사, 도총부 등이 있다.

궐내각사의 관리들은 경복궁의 서쪽 문인 영추문(迎秋門)을 통하여 드나들었다. 이처럼 많은 궐내각사의 건물들은 지금 모두 사라지고, 오직 훈민정음 창제의 본 고향으로 집현전이 있었던 수정전만 남아 있다.
경복궁의 정전(正殿) 근정전(勤政殿)의 정문인 근정문은 3개의 문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동쪽의 일화문(日華門)과 서쪽의 월화문(月華問)은 각각 문관과 무관이 드나들던 문이고 가운데 문은 왕과 왕비만이 드나들수 있는 문이었다.

근정문을 들어서면 2층의 돌로 만든 월대위에 우람한 근정전이 마주 보인다. 근정전은 정전(正殿)이라고도 하는데 경복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근정전에서 이루어 지는 업무는 여러가지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조참으로 매월 4번에 걸쳐 신하들이 왕에게 하례를 드리는 행사다. 그외에 외국 사신의 접견, 왕의 즉위식, 과거 시험이나 나이많은 고위 관리들을 위한 연회가 이곳에서 치러졌다.

근정전이란 명칭은 정도전이 지은 이름인데 부지런할 근(勤)과 정사정(政)을 정전의 이름으로 정한 이유에 대해서 “천하의 일은 부지런히 해야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쇠약해 지고 무너져 버리는 것이 필연적 이치입니다. 작은 일에 있어서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나라를 다스리는 큰일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조 여러 왕들 중에서 근정전의 뜻에 부합하게 가장 부지런히 일한 임금은 세종대왕을 따를 왕이 없다. 21세에 등극해서 53세로 승하할 때까지 32년 동안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지금으로 말하면 새벽 4시에 일어나 어른들에게 문안 드리는 것으로 시작해서 밤 11시가 지나서야 취침했다고 하니. 엄청난 업무량이었다.
그러면서도 6명의 비빈에게서 18명의 왕자와 4명의 공주, 옹주를 출산케 했으니 세종대왕의 정력 또한 대단하다 할 것이다.

세종대왕은 자신만 부지런한 것이 아니다. 신하들도 백성들을 위해 열심히 일할 것을 항상 주문했기 때문에 대신들 중에는 관직을 떠나려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고 한다. 예를 들면 훈민정음 창제의 수훈자인 정인지가 부모상을 당하여 세종대왕에게 3년상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사직하자, 세종대왕은 3년상의 의무를 해제하는 법령까지 만들면서 정인지를 붙들어 두었다.
세종대왕때 우리나라가 모든면에서는 많은 발전을 이룬 원동력은 근정의 이치를 터득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근정전 앞에는 축구장 절반정도 되는 너른 마당이 있는데 이 마당을 조정(朝廷)이라고 불렀다. 국가의 중요한 행사 때는 정일품부터 구품까지 모든 대신들이 이곳 조정에 참예하게 된다. 그래서 후일에 조정은 이조 왕실의 정권을 대신하는 말로 쓰이게 된다.

조정의 바닥은 대강 다듬은 울퉁불퉁한 화강암을 깔아 놓았다. 궁정의 건축물은 대부분이 광택이나게 잘 세공해 놓는 것이 보통인데 일부러 투박한 화강암을 사용한 이유가 있다. 세공을 해놓으면 햇빛이 돌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게 되고 가죽신을 신은 대신들이 미끌어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눈이나 비가 오면 몹시 미끄러지기 때문에 일부러 이런 투박한 돌을 사용했다고 한다.

눈으로 보기에 조정은 평평한 마당처럼 보이지만 실은 근정전 쪽이 근정문 쪽보다 1m 가량 높아서 비가 와도 조정에는 물이 고이지 않고 근정문 쪽으로 흘러 내려가게 되어 있다.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보면 사방에 잘 다듬어진 대리석이 번쩍이고 있다. 햇빛이 반사되고 사람들이 미끌어 넘어지는 것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 것이다. 조정 양쪽에는 43개의 우람한 기둥 사이에 회랑이 있고 예전에 창고로 사용하던 행각이 있었다. 그래서 회랑과 행각을 합쳐서 행랑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기둥 사이에 줄줄이 늘어선 행랑이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줄줄이 이어져서 까마득하게 보인다. 꽁지가 빠지게 급히 도망가면 금새 까마득하게 보인다. 그래서 이렇게 내빼는 것을 “줄행랑”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높다란 두 줄의 기둥들이 행랑을 받치고 있는데 조정(朝廷)에 면한 안쪽기둥의 주춧돌은 동그랗고 바깥쪽의 주춧돌은 네모난 모양을 하고 있다. 이것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라는 천원지방(天圓地方)사상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왕이 계신 안쪽을 둥글게 하여 천상의 세계로 표현하고 백성을 의미하는 바깥쪽은 네모지게 하여 땅을 뜻하게 함으로써 왕의 위치를 천상의 권위에 비유하고 있다. 천원 지방 사상은 3국시대 때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우리문화 유적에서 항상 볼 수 있다.

서울 송파구 석천동에 있는 한성백제 초기의 돌무덤들은 네모지고, 또 원형으로 되어 있고 어떤 무덤은 네모 속에 둥근 봉분이 있다. 창덕궁 비원에 있는 부용지 연못을 보면 천원지방 사상을 피부로 느낀다. 네모진 연못 속에 둥근 섬을 만들어 놓고 있는데 바로 옆에는 임금이 쉴 수 있는 부용정을 마련해서 마치 백성을 거느린 높은 천상에 계신 임금을 표현하고 있다. 백성들이 매일 사용하는 상평통보는 둥근 엽전의 중앙에 네모난 구멍을 뚫어 놓고 있다. 바로 임금의 보호를 받는 백성의 모습을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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