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에 깃든 우리 역사 11 : 수정전(修政殿)
보스톤코리아  2010-05-31, 11:35:55 
집현전이 있었던 수정전
집현전이 있었던 수정전
편전인 사정전에서 서쪽 담에 뚫린 쪽문을 나서면 바로 나서는 꽤 큰 건물이 수정전이다.
근정전이나 경회루보다는 작지만 정면 10칸, 측면 4칸 해서 40칸이나 되는 큰 건물이다.
사람 키만큼 높은 월대 위에 지은 큰 건물로, 높은 월대만으로도 이 건물이 중요한 전각 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건물이다.

바로 이 건물이 세종대왕 때 젊은 인재들을 모아 학문을 연구하게 하였던 집현전의 본 고장인 수정전이다.
원래 집현전은 고려 때부터 있었던 학문 연구 기관이었는데 세종대왕 때 학문연구와 관련된 여러 기관을 집현전으로 통합시키고 그 자리에 수정전이라는 멋있는 건물을 마련한 것이다.

이때부터 집현전은 경전과 역사를 강론하고 임금의 자문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20여명의 학사를 두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게 하였는데 후에는 정치인으로도 많이 등용해서 실제 정치를 통하여 그들이 학문에서 꿈꾸던 이상(理想)을 현실에 접목 시키려는 노력을 많이 하였다. 그래서 집현전 학사들이 후일에는 정치 일선에 나서서 큰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창덕궁 비원에 있는 규장각 건물 주합루
창덕궁 비원에 있는 규장각 건물 주합루
 
집현전에서는 꽤 많은 책을 출판하였는데 정인지의 고려사, 이순지의 농사직설, 수양대군의 석보상절을 필두로 오례의(五禮儀), 팔도지리지, 삼강행실, 지평요람, 동국정운,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의방유취 등을 들을 수 있다.이렇게 여러가지 책을 출간했지만 모두가 한문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한문을 모르는 백성들로는 거의 대부분이 이해할 수가 없는 책들이었다. 농사직설은 농사 짓는 방법을 쓴 책인데 한문을 모르는 백성들이 어찌 책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집현전의 업적에서 제일 손꼽을 수 있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훈민정음(訓民正音)창제가 틀림 없을 것이다.
세종대왕께서 이해 하기 쉬운 우리나라 말을 만들려고 한 직접적인 동기는 자식들이 부모에 대한 효성이 부족한 데서 시작 되었다고 한다. 오래 전에 없어져야 했던 고려장이 세종 때에도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태백산맥 산중에 남아 있는 노사암(老捨岩), 노사굴(老捨窟), 살애비들, 살애비 바위가 바로 고려장을 했던 곳이다.

세종께서는 한탄 하면서 “무지 몽매한 백성들이 미처 숨이 끊어지기도 전에 노부모를 밖에다 내다 버리니 이 폐습을 그대로 둘 수 없다.” 라는 교지를 내리고 있다.
주합루 앞쪽에 임금이 드나드는 큰문이 어수문이다. 그 옆에 신하들이 머리를 꼭 수그려야만 드나들 수 있는 쪽문이 보인다.
주합루 앞쪽에 임금이 드나드는 큰문이 어수문이다. 그 옆에 신하들이 머리를 꼭 수그려야만 드나들 수 있는 쪽문이 보인다.
 
세종 10년에 진주 사람 김화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했던 사건이 있었다. 이에 충격 받은 세종은 모든 것이 백성들을 잘못 지도한 임금의 잘못이라고 자책하면서 효자 충신들의 사례를 담은 행실도를 간행하게 하였다.
물론 백성들에게 효도에 대한 모범 답안을 가르쳐 주려고 책을 간행했지만 한문을 읽지 못하는 백성들에겐 그림의 떡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대왕께서는 누구나 쓰기 쉽고 읽기 쉬운 우리말 창제를 결심 하신 것이다.

못 믿을 사실은 대부분의 집현전 학사들이 진서(眞書)인 한자를 제쳐두고 한글을 창제하는데 거센 반대를 했었다는 것이다.
사실 한글 창제는 신숙주, 성삼문, 정인지 등 몇 명 안 되는 집현전 학자들과 세자인 문종 및 수양대군, 안평대군이 세종 대왕을 보필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세종께서는 경회루 연못가에 초라한 초가집을 지어놓고는 꽤 많은 시간을 그곳에 기거하면서 한글 창제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세종 대왕은 어린 시절부터 건강이 좋지 아니했는데 하도 책에 매달려 지냈기 때문에 부왕인 태종대왕이 책을 감춰 버리기 까지 했다고 한다.
예전의 궐내각사 자리, 건물은 모두 헐리고 그 자리에 잔디밭을 만들었다.
예전의 궐내각사 자리, 건물은 모두 헐리고 그 자리에 잔디밭을 만들었다.
 
한글을 창제할 때는 당뇨병에 등창까지 겹쳐 건강이 몹시 악화 되었는데도 초가집 생활을 고집한 이유는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을 임금도 몸과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는 것이었다.

10여 년 넘게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서 세종 28년에 비로서 훈민정음을 반포할 때 최만리를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가볍게 옛사람들의 운서에 터무니 없는 언문(한글)을 붙이면 되겠습니까?”라는 무례한 항의에 세종께서는 “너희가 운서를 아느냐?” 면서 반박하자 당대 내로라하는 집현전 학자들이지만 한마디 대답을 못하고 있다.

최만리는 집현전의 책임자로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역량과 실력은 감히 최만리가 상대할 수 없는 영역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0년을 넘게 고심하고 고심해서 만든 우리글을 “아랫 글” 이라고 하대 하면서 중국 문자만을 써야 한다고 우기니 세종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는가?

세종대왕은 한글창제를 반대하는 집현전 학자들을 전원 감옥에 가둬 버렸다.
집현전 학자라면 끔찍하게 생각해서 특혜에 특혜를 더하여 대우해 주었는데, 대왕의 심정이 오죽했으면 그들을 하옥 시켰겠는가?

집현전 학자들이 연구에 충실하라고 사헌부의 감찰을 받지 않고 10~20년 가까이 부서를 옮기지 않아도 되는 신분 보장을 해주었다.

“사가 독서” 라는 특별 휴가도 주고 궁에서 삼시 세끼를 대접 해주는 특혜를 베풀어 주었었다.
한번은 신숙주가 집현전에서 밤 늦도록 독서를 하다가 피곤하여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세종대왕이 집현전에 들렸다가 잠든 신숙주를 깨우지 않고 곤룡포를 벗어서 덮어 주었다고 한다.

세종께서 집현전 학자들을 생각 하시는 것이 이렇게도 특별하였던 것이다.
정인지가 쓴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집현전 학자들이 세종의 명을 받아 한글 28글자의 원리와 용례를 해석하는 일을 맡았다고 쓰고 있다. 그러면 정작 훈민정음을 만든 사람은 누구인가?

해례본 서문에서 한글을 창제한 사람에 대한 언급이 있다. 정인지는 전하창제(殿下創製) 즉 전하가 지으셨다고 명기하고 있다.

성삼문이 쓴 “직해 동자 급” 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그는 한글을 만든 사람이 세종과 문종이라고 쓰고 있다.
최만리가 “언문(한글)은 새롭고 기이한 한가지 재주에 지나지 못하는 것으로 학문에 방해됨이 있고 정치에 유익함이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옳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세종의 반박은 “너희가 설총(이두 문자를 만든 신라 사람)은 옳다고 하면서 제 군주가 하는 일(한글창제)은 그르다 하는 까닭이 무엇이냐?” 라고 대답하셨다.

세종 자신이 스스로 한글을 만든 사람이 자신임을 밝히고 있다.
훈민정음을 반포한 후 3년 뒤에 세종께서는 건강이 악화되어 승하하시고 문종이 뒤를 잇게 된다.

문종 또한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학문을 연구 수련했기 때문에 그들을 대하는데 특별하였다.
달 밝은 어느 밤에 문종은 수정전의 집현전 학자들을 침전인 강녕 전으로 불러 들여 친히 술을 권하며 어린 왕세자(단종)를 옆에 앉히고 “내가 이 세상을 떠 천추만세한 후일지라도 경들은 이 어린 것 잘 보살펴 주시오.”하면서 뒷일을 거듭 부탁하였다.

이 날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은 술에 만취되어 인사불성으로 수정전에 돌아와서 쓰러져 잠들었는데 다음날 깨어보니 임금께서 덮으시는 이불을 덮고 잔 것을 알게 되었다. 학자들은 감읍할 밖에 없었고 2년 후에 문종이 승하하고 단종이 삼촌인 수양대군(세조)에 의하여 폐위되자 성삼문, 박팽년 등의 집현전 학자들은 단종 복위 운동으로 목숨을 잃지만 신숙주는 세조 편에 서게 된다.

집현전 학자들이 주동이 되어 단종 복위 운동이 있었기 때문에 세조는 젊은 학자들의 학문 연구 요람인 집현전을 아예 폐쇄해 버렸다. 이것으로 수정전의 오랜 영광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게 된다.
세조 이후에 역대의 왕들이 수정전에 집현전을 되살리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이조 후기 정조 대왕 때에 비로서 창덕궁 비원 부용지 옆에 집현전과 비슷한 성격의 규장각이 생기게 되었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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