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生)
보스톤코리아  2010-07-19, 11:39:19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다. 무관심이다(it’s indifference). 믿음의 반대는 이교(異敎 Heresy)가 아니다. 무관심이다. 생(生)의 반대는 사(死)가 아니다. 그것은 무관심이다.” – 엘리 비젤(Elie Wiesel: 노벨수상 교수)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生)고 죽어도 주(主)를 위하여 죽(死)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 로마서 14장 8절.”


“외모가 뛰어나거나 방송인 출신처럼 말을 잘하지도 못한다. 다만 국민의 선택을 받아 국회의원을 했고 소통(疏通: mutual understanding)을 잘못하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인터넷 관련 일을 해 업무(청와대 대변인)를 맡게 된 것 같다”고. 새 청와대 대변인(여) 김희정(한국 인터넷 진흥원장)씨의 소감이다. 공공기관에서 “사달•지시”와 같은 관(官)이 쓰는 단어가 쌓여서 소통과 멀어지는 것이라며 “국민 눈높이에 맞는 말부터 사용하겠다”고.

청와대 대변인이면 ‘대통령의 입’이다. 입은 듣는 국민들의 귀와 마음에 소통력을 가지는 것이 아주 중요한 것이 사실이다. 지금 서울엔 청와대와의 소통뿐 아니다. 여당인 한나라당 안에 소통이 막힌지 오래다. 6.2 선거의 패인(敗因: a cause of defeat)이기도 했었는데. 한나라당 새 대표로 뽑힌 안상수 대표도 바로 이 소통을 과제로 내놓았다. 연내 개헌(改憲)을 내걸고 당내 소통과 야당들과의 소통을 해야 한다고. “제왕적 대통령제는 한계에 이르렀고 권력 분산이 필요하다. 개인 생각으론 분권형 대통령제이지만 논의하면서 방향이 정해질 것”이란다. “박근혜 전 대표가 총리를 하면 (본인으로서는) 국정 경험을 쌓을 수 있고 그것이 화합의 상징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박근혜 총리론’을 주장하는 것”이라며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를 만나 서로 소통이 되도록 중간 역할을 잘 해보겠단다.

15일 오전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 한나라당 새 지도부가 첫 공식 일정으로 현충탑 헌화에 안상수 대표와 나경원, 정두언, 서병수 최고위원 등이 나란히 섰는데 전날 2.2% 차이로 2위에 머무른 홍준표 최고위원이 안 보였다. 병원 진료가 불참 사유. 뭔가 최고위원들 사이에 소통이 문제 됐다. 홍준표의 불만은 “민심은 변화와 개혁(홍준표)을 원했지만 한나라 전당대회는 현실 안주(안상수)를 택했다. 역시 바람은 돈과 조직을 이기지 못한다는 점을 절실히 느꼈다”나? 국민 여론 조사에서는 안 대표를 3% 가량 앞섰는데 대의원 투표에서 4.4% 뒤져 한나라당 새 대표에 패했다는 독백(獨白: a monologue).

민주주의 최종 최고의 판결인 투표의 결과에 승복이 안 되면 의견 소통은 문제 중 문제로 떠오를 수 밖에. 어쩌면 안상수 대표의 과제는 개헌 발의에 앞서 한나라당 최고위원들 간의 ‘말의 소통’이 더 시급한 과제일지도 모른다. Mutual Understanding(疏通)이란 말 자체가 혼자가 아니다. 상대(partner)가 있다는 말이다.
손톱 미용원(Nail salon)에서 만난 여인들 두 사람이 대화를 하다가 서로 소통이 안 돼서 싸움이 벌어져 손찌검하다가 발길질까지… 임신 6개월된 토리 캐트론(Tori Catron, 26세)의 배를 때려 애기가 사산(死産: a stillbirth)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가해자는 우드하우스(Ayanna Woodhouse, 25세), 죽은 아이의 아버지와는 4촌간이다. 사건은 도체스터 네일살롱에서 있었고 (지난 4월) 사건 심리는 서포크 고등 법원(Suffolk Superior Court). 보석금은 2만 달러로, 유죄 판결 나면 25년 이상 징역이란다.

부부 간에 말 다툼으로 더 끔찍한 사건이 매사추세츠 주 윈체스터(Winchester, Mass)에서 지난 6월 16일에 일어나 끔찍한 사건. 토마스 모티머 4세(Thomas Mortimer IV, 43세)가 아내(Laura Stone Mortimer, 41세), 아들(Thomas Mortimer V, 4살), 딸(Charlote Mortimer, 2살), 그리고 장모(Ragna Ellen Stone, 64세) 등 모두 4명을 흉기로 찔러 죽이고 “내가 죽였다”는 종이쪽지를 남기고 집을 나갔다. 범인은 쉽게 잡혀 재판이 진행 중이지만 범해 동기는 “After an argument with his wife: 그의 부인과 말싸움 끝에”란 발표가 모두다. 특히 4살 아들과 2살 딸을 죽인 장면은 수사관들조차 말을 잇지 못했었다. 남편•사위•아버지란 사람이 아내와 말다툼이 있었다고? 生과 死가 얼마나 가까이 있으며 언제 어디에서 나를 찍어낼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이 生과 死를 가늠하는 현실이다.

생사(生死)의 두 글자를 뜯어보면 역시 뜻은 깊다. 生: 산야(産也)•낳을 생, 출야(出也) – 날 생. 내 뜻, 네 뜻에 관계없이 태어난다는 것. 없었던 것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두 가지 뜻이 生에 담겨있다. 첫째는 “丿: 左引之좌인지 – 삐칠 별, 곧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다는 뜻이다. 누가? 주(主): 군(君)야(也)-임금 주, 곧 임금 중 임금인(王中王) 예수 그리스도가 땅으로 현신(顯身: incarnated)하셨다는 뜻이다. 하여 생(生)은 한마디로 모든 출생이 나면서부터 예수그리스도의 식구가 되어서 땅에 나타난다 하면 확대 해석일까?

바울 사도(Apostle Paul)의 고백은 바로 이 뜻에서 나왔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For none of lives to himself alone and none of dies to himself alone. 우리가 살아도 주(主)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主)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主)의 것이로다: If we live, we live to the Lord and if we die, we die to the Lord. So, whether we live or die, we belong to the Lord. 로마서 14:7,8.”

둘째는 生=人(사람)+土(흙). 행여 예수님이 왕중왕으로 오셨다는데 반기(反旗:opposing)를 드는 세상의 왕들이 있을 것 같아서 아예 인자(人子)예수님이 땅(土)에 죽으러 오신 것이 生이라면? 人이 아니고 (丿 + ㅡ) 약간 변형된 사람 모습인데 이는 땅으로 오신(丿)하나님(ㅡ)을 그린 것이다. 예수님이 땅에 오셔서 흙(土)에 묻히신 것은 “골고다(Golgotha)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류를 죄(罪)에서 구원하셔서 하나님과 재화합(再和合: Reconciliation)시킨 중재자(仲裁者: Mediator)로 이 땅에 오셨다는 뜻. 까닭에 生은 첫 번째의 主님으로 땅에 오셨든 (丿) 두 번째 인(人)자로서 흙(土)에 꽂히러 오셨든 예수님, 곧 인간들의 구세주(救世主: The Lord of Salvation)와 직결되어 있다. 生은.
헌데 사람들은 生과 死(사)를 갈라 놓는다. 세상의 법(法: the Law)은 生死를 가르지만 죽음이 끝이다. 이것이 한계(限界: limit)다. 하지만 인간들을 죄의 죽음에서 건지시려는 예수님의 生은 이 죽음의 한계를 깨고 삶을 영원에 연결시킨다.

먼저 죽음을 보자. 死: 절야(絶也)-끊일 사 뭐가 끊어지는데? 숨결이 끊어지는 것과 죽음은 같은 뜻이다. 死=歹: 剔肉殘骨척육잔골 – 살 발은 뼈 알+匕 劍명(名)ㅣ首검명신수-비수비. 여기서 첫 번째 歹:‘살 발은 뼈 알’ 자는 죽은 사람의 시신이 땅속에서 썩는다는 뜻이니 끝이다. 그런데 두번째 匕(비수비)자는 살을 밝아내려 붙어 있는 것 칼이 아니다. 이 匕는 ㅣ首신수, 곧 하늘에서 내려온 지혜(首=頭也-머리수)를 말한다. 성경에서 이 匕, 즉 칼을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The Sword of the Spirit which is the Word of God: 에베소서 6:17)”이라 밝힌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죽음이 마지막, 최후의 궤계(詭計: Devil’s schemes)”인 마귀의 전략에 맞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Full armor of God) 중 최후의 장비다. 쉽게 말하면 마귀의 마지막 공격 수단인 “죽음을 막아내는 칼(匕)”이 死에 붙어 있다. 한 마디로 “죽음을 이기는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신다는 말씀.

하여 生에도 死에도 예수님이 관여하신다. 이를 증거하는 바울 사도의 금언이 “이(죽음)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작와 산 자의 主가 되시려 하심이니라: For this very reason (for the dead), Christ died and returned to life so that he might be the Lord of both the dead and the living – 로마서 14:9.”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生과 死가 하나로 묶여 있다. 세상 사람들은 生과 死를 갈라 놓는데.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에게 몰입(沒入: devotional)하게 된 가장 큰 사유가 “그리스도 안에는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된 것. “그(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의 화평이신 자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케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and in this on body to reconcile both of them to God through the Cross by which he put to death their hostility – 에베소서 2:14-16.”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the law with its commandments and regulations)’은 모세의 율법과 계명을 뜻한다. 이 계명과 율법으로 삶과 죽음, 이스라엘인과 이방인(Israelites and Gentiles)을 갈라 놓은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탁탁 털어서 하나로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 예수 안에 묶었다는 것.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담대하게 고백한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Christ will be exalted in my body whether by life or by death. For to me, to live is Christ and to die is gain. – 빌립보서 1:20, 21.” 해서 바울의 선언은 분명하고 단정적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永生)이니라: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 로마서 6:23.”

하여 바울은 아예 육체를 떠나 主와 함께 살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었다.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We) would prefer to be away from the body and at home with the Lord: 고린도후서 5:8.” 바울서신(Paul’s Epistles)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In Christ” 구절이 194회나 되풀이 되는 것을 봐서도 “예수님과의 밀착”을 얼마나 얼마나 사모했는지 짐작이 간다.

디마시(Salvatore F. DiMassi) 전 매사추세츠 주 하원의장은 보스톤 시립 법정(Boston Municipal Court)으로부터 8개월 동안의 생계비 소급 지급분 $40,000과 매월 $5,000씩 생계비를 지급하도록 명령이 내렸지만 주 검찰청과 매사추세츠 주 하원 보상금 지급 위원회의 반발로 집행이 미뤄지고 있다. 디마시 전 하원의장의 뇌물수수 사건 기소가 진행 중이므로. 디마시 전 의장은 30년간 주 하원의원 생활을 했으며 3회 연속 하원의장을 역임했었지만, $57,000의 수뢰 혐의, 뇌물 강요 혐의, 우편•전신 협잡 등의 연방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있다. 디마시 전 의장은 법학 박사 학위를 서포크대 법대(Suffolk University Law School)에서 받고 Suffolk County 검사보를 거쳐 사법 변호사를 해온 범죄 수사 전문가이면서, 법을 잘 아는 지식을 역이용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을 듯. 법을 알아서 법을 피하기만 하면 ‘남은 죽어도 나는 살 수 있다’는 타산적인 生이 자기 무덤을 판 셈. 100년이 넘는 이태리계 이민자 중에 매쓰주 하원의장, 그것도 3회 연속 역임한 기록을 세운 ‘디마시의 끝’이 자기 몸 속에 있는 하늘나라(Kingdom of God is within you: 누가복음 17:21)를 못 보는 死의 벼랑 끝에 서 있다. 법률의 학위를 믿을 때가 아니다. 겸손히 회개하고 예수님의 손을 잡으라. 그분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자신들만이 아니다. 나라와 국민을 살게 하는 生과 死의 갈림길에서 그 길의 主人이 예수님이신 것을 잊지 말자. 무슨 일이 있어도.

신영각(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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