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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시간, 기억
보스톤코리아  2011-09-21, 09:16:22   
(주의! 다량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필립 K. 딕의 원작을 영화화한 ‘블레이드 러너’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해리슨 포드가 연기한 주인공 데커드가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믿고 있는 레플리컨트(인조인간) 레이철을 탐문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그녀에게 말해줌으로써, 그 기억이 이식된 것이라는 것을, 곧 레이철이 인조인간임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장면이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기억이 자신의 정체성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 지를 알려주고 있다.

줄기세포, 그리고 복제라는 개념들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면서 동시에 복제된 정체성에 대한 의문, 그리고 그로부터 철학의 전통적인 질문인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여기서 ‘누구’ 대신 ‘무엇’으로 질문을 바꾸어 보자. 과학자의 입장에서 ‘나’란, 곧 ‘나’를 구성하는 분자들 그리고 그것들이 연결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 보자. ‘나’를 구성하는 물질중의 일부가 제거되거나 교체되는 경우 ‘나’는 여전히 ‘나’인가? 손톱이나 머리카락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 본다면, 물질중의 일부가 분리된다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나’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것을 ‘정체성이 유지 된다’ 고 짧게 표현하자.)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면 사고로 인해 팔, 다리와 같은 신체의 일부를 잃는 경우, 또는 심장, 눈과 같은 장기를 대체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고, 우리는 그 경우에도 어렵지 않게 우리의 정체성이 유지된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이 일관성, 즉 부분/기관의 상실/대체가 전체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두뇌를 대체하는 상상에 이르게 되면, 그 믿음은 더 이상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어떤 미래에, 뇌의 모든 상태를 컴퓨터에 업로드 할 수 있게 된다고 해보자. 그리고 나의 노화된 뇌를 컴퓨터로 교체한 다면, 그때의 나는 정체성이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래 기억에 관한 두 작품은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기억에서 찾는지를 말하고 있다.

만약 기억을 지속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떻게 일상을 살 수 있을까? 영화 ‘메멘토’는 기억을 10 분 이상 지속할 수 없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는 모든 정보를 폴라로이드 사진과 메모, 그리고 자신의 몸에 새긴 문신을 이용하여 기록을 남기고 그것으로 자신의 가정을 파탄 낸 범인을 찾으려고 한다. 후에 ‘다크나이트’로 이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불릴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미 그의 가능성을 이때부터 보였다. 그리고 그의 기억에 대한 집착은 ‘인셉션’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반면 올해 출간되어 잔잔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S.J. 왓슨 의 소설 ‘Before I go to sleep’은 보다 평온하다. 40대 여성인 크리스틴은 잠이 들면 모든 기억을 잊게 되고 다시 깨어날 때는 20대의 어느 순간까지만의 기억을 가지고 깨어난다. 옆에서 자고 있는 낮선 남자가 자신이 남편이라고 이야기하며, 남편이 출근한 후 전화가 울리면 정신과 의사는 숨겨진 일기장의 위치를 말해준다. 그 일기장의 첫 페이지에는 남편을 믿지 말라는 한 문장이 쓰여 있다. 소설의 제목대로 크리스틴은 잠들기 전에 가능한 한 자기가 알아낸 많은 것을 일기장에 써 놓고 자야 한다.


시간은 특별한 자원이다.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오직 죽음만이 시간을 그에게서 빼앗아 갈 뿐이다.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은, 이 시간을 그가 가진 최고의 무기로 삼기도 하고, 때로는 싸워 이겨내야 할 지고의 가치이자 목표로 삼아 발버둥 친다. 그 투쟁에 의해 시간은 각 개인에게 기억으로 바뀌어 남겨지게 된다.

시간을 지배한다는 개념은 근세 유럽에서 불사의 인간으로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생 제르망’ 백작의 경우처럼 과거에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재였다. 불사의 인간을 극히 현실적으로 이야기한 ‘The man from earth’ 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 내내 인물들은 한 집에서 대화를 나눌 뿐이지만, 주인공이 풀어놓는 이야기는 관객들뿐만 아니라 영화 속의 다른 인물들까지도 그에게 경외심과 의구심을 동시에 갖게 만든다.

‘백 투 더 퓨처’, ‘엑설런트 어드벤처’와 같이 흥미위주의 소재로 다루어지던 시간여행의 아이디어를 가져오되, 보다 현실적인 살을 붙여 아름다운 로맨스로 만든 다음 두 작품은 시간을 다르게 경험한다 하더라도, 기억이 유지되는 한 타인과의 교감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드리 니페네거의 ‘시간여행자의 아내’는 스스로 다른 시간대로 이동하는 것을 조절할 수 없는 한 남자의 사랑이야기이다. 여자주인공은 어렸을 때 이미 성인인 장래의 남편을 만나고, 그가 사고로 죽은 후에도 젊은 시절의 그가 찾아오는 것을 기다린다. 소설은 SF의 재미와 독자의 인생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감동을 모두 가지고 있으나 영화는 다소 그에 미치지 못한다.

‘위대한 개츠비’를 쓴 스콧 피츠제랄드의 단편을 바탕으로 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영화로 바뀌어 더욱 감동을 준다. 주인공 벤자민 버튼은 정신은 보통사람과 같으나 노인의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 중년과 젊은 시절을 거꾸로 겪고 아기로 죽는다. 브래드 피트의 인상적인 분장과 연기뿐만 아니라 케이트 블랑쉐의 신비한 매력을 함께 확인할 수 있다.

시간에 대해 연구하는 것은 과학자에게도 커다란 유혹이다. 이 분야의 가장 유명한 인물은 누가 뭐래도 아인슈타인일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시간은 공간과 연결되어 있고, 절대적인 시간이란 없음을 보였다. MIT 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물리학자이자 소설가인 앨런 라이트맨의 ‘아인슈타인의 꿈’은 이런 시간에 대한 다양한 상상을 우아하게 그려놓은 작품이다.

인간이 최후의 순간에 자신의 인생을 다시 보는 것을 주마등과 같다고 한다.(누가 알랴만은!) 매일 아침, 하룻밤의 꿈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나는 깨어난다. 꿈속의 나에게는 그것이 최후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희생의 대가로 깨어난 나는 다시 오늘 하루가 주어졌다는 것에 안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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