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왜곡과 동북공정 3.
보스톤코리아  2007-05-27, 01:29:03 
백린 (역사 학자 )

이야기가 딴 곳으로 흘러 버렸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자. 전시한 고지도는 한반도와 만주지방의 지도들이다. 그런데, 그 중에도 관심을 끈 것은 '요계관방도(遼계關防圖)'이다. 이 지도는 그 옛날 중국과 경계하는 지도로써 고구려와 발해의 강역을 고찰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되었다. 고지도는 아니었지만 역사적인 가치로 보아 더 할 수 없는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되기에 광개토 호태왕의 비문 탁본 4폭도 같이 전시 했다. 관람자들이 가장 관심을 보인 것은 고산자 김 정호의 대동여지도 22폭과 고구려 광개토 호태왕 비문 탁본이었다.

만주의 집안현 통구에 있는 이 고구려 제 19대 광개토 호태왕비는 고구려의 건국 실화와 함께 호태왕의 고구려 전성기를 말해 주는 제 1급 사료라고 하겠다. 평안북도 강계군 건너편에 압록강으로 흘러 들어오는 동가강이 보인다. 동가강 양편에 펼쳐진 평야가 옛 고구려의 국내성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이다. 그 부근에는 지금도 국내성 성터의 잔해가 남아 있어 옛 모습을 연상케 한다는 것이다. 이 동가강 평야의 동쪽에 크고 작은 무덤들의 고분군을 이루고 있는데 그들 무덤이 곧 고구려의 왕족과 귀족 장군들의 무덤일 것이라는 것이다. 이들 무덤 가운데 장군총이라고 일컫는 큰 무덤이 있고, 그 맞은편에 장군총과 크기가 맞먹는 또 하나의 무덤이 있다. 옛날 이 곳에 살던 조선 사람들은 이 무덤을 가르켜 대왕릉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 무덤 바로 앞에는 광개토 호태왕의 비가 높이 서 있다. 그래서 이 대형 무덤이 고구려 제 19대 광개토 호태왕의 왕릉임을 알게 되었다. "만포진 구불 구불 육로길 아득한데..."라는 노래도 있지만, 만주의 집안 즉 옛날 고구려의 국내성에서 압록강을 건너, 만포진-강계-희청-덕천-안주를 지나 순천-양덕-평양으로 들어 오는 험한 산길은 고구려가 한반도로 남하하는 통로 이기도 하였다.

비문의 제목은 '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라고 쓰여져 있다. 비 제목이 보여 주다시피 고구려의 제 19대 광개토 호태왕은 재위 22년 동안(386년~414년) 고구려를 아시아의 대강국으로 올려 놓은 제왕이다. 당시에 고구려의 판도는 서쪽으로 요하를 건너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동으로는 지금의 연해주에 이르렀고 북으로는 흑룡강을 경계로 하였으며 남으로는 백제와 신라에 대치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역사는 이때를 5호 16국 시대라고 한다. 북쪽 오랑캐인 흉노가 서기 317년 진나라의 수도 낙양을 함락 시키고 중원에 입성한다. 진왕조는 강남의 건강(建康)으로 천도하여 동진으로 그 수명을 보존한다. 이와 동시에 몽고족 계열인 선비와 서장족의 제, 강 등이 각각 그 지역에서 독립 정권을 수립한다. 흉노의 선비와 제, 강 그리고 흉노의 별종인 갈(褐)을 합하여 5호 라고 한다. 호(胡)라고 하는 것은 중국이 외방 민족에 대한 통치이었다. 그리고 이들 민족의 정권은 다시 분열되어 16개국을 이룬다. 그래서 이시기를 5호 16국 시대라고 하는데, 150년간 중국이 한족을 압박하여 대동란기를 이루었던 것이다. 사실 광개토 호태왕은 이같은 혼란기에 30만 대군으로 능히 중원을 공략할 수 있었을 것이나 호태왕은 요동 이동의 동북지방의 안전을 도모하고 나아가 신라를 도와 한반도를 수호하는 것을 그 사명으로 알았지 하북의 중심지인 중원에 대한 관심은 별로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본다. 어쨌든 당시의 고구려 세력은 멀리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광개토 호태왕비는 그의 아들 장수왕이 부왕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장수왕 2년(서기 414년)에 세운 비석으로 현존하는 고구려의 귀중한 사적으로 최대 최고의 금석문이다. 그런데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한국의 정사인 삼국사기와 한국유사는 물론 중국의 한 당서에서도 이 호태왕의 비문이 인용된 사실을 발견치 못했다. 이 비문이 발견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사실은 청나라의 덕종 8년(1875년)에 봉천(심양)의 태수 숭실(崇實) 이라는 자가 미정 시찰을 위하여 집안현에 순찰 나갔다가 통구(通溝)에서 거대한 비석을 발견하고 그 비석의 연고를 알아 본바 그것이 고구려 제 19대 광개토 호태왕의 송덕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비석은 서기 926년 발해가 망한 후로 1,000여년간 찾는 이 없이 초원(草原)에 버려져 있어서 그 역사의 주인을 몰랐던 것이다. 이 광개토 호태왕비는 응희암으로 높이가 6.39 미터나 된다. 이 자연 거석의 4면에 전한대의 예서체로써 1,800여 자가 음각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1,600여년 전에 세워진 비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큰 비석이며 국보로서 귀중한 역사적인 사적이다. 비문이 예서체로써 음각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또 그 크기가 6미터 이상이니 그대로 서서 보고 읽을 수가 없는 비석이다. 금석문은 탁본을 만들어서 이용하고 보존하게 마련이다.

지난 2005년 5월 27일자의 한국일보 문화면에 '광개토대왕비 비문 변조'라는 제목하에 전북대 김 병기 교수의 견해가 실려 있는 것을 보았다. 사실은 광개토호태왕 비문의 조작문제는 당시 노학자들 사이에서 이미 있었던 논란이다. 그 논쟁이 있은지는 40년이 지났다. 이제 세월이 많이 지났으니 그 정확한 내력을 밝혀도 될 것 같다. 호태왕비의 탁본은 중국 청나라 말기때 만들어진 탁본과 일제 시대에 일본인이 제작한 탁본 몇 종류가 있다. <다음에 계속>


이 호태왕비가 전한때의 예서로 쓰여져 음각 되어 있고, 원체 비가 크기 때문에 탁본을 만드는 것도 쉽지가 않다. 비문의 탁본을 만들려면 먼저 비신을 깨끗이 해야 한다. 그런데 오래된 비석이라 이끼가 두텁게 끼어 이를 물로 씻고 불로 태우고 흙 먼지를 털어 내다 보니 비면에 손상이 많이 가서 상한 글자가 많이 생긴다. 그 때문에 비문 판독의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 일본인이 호태왕비문을 판독하기 위하여 희미한 글자를 회화용 페인트로 덧칠을 하여 자기들 견해에 맞게 모조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품게 했다. 사실 일본이 만든 탁본을 보면 흰색깔로 덧칠한 흔적이 보여서 논란을 빚고 있다. 탁본의 기술은 중국인이 능숙하다. 그러므로 비문 왜곡 조작을 확인하려면 청나라때 중국인이 만든 탁본과 대조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나 현재로 중국 탁본은 구해 볼 수가 없다. 예서로 쓰여진 이 비문을 현대체 해서로 고쳐 쓴 다음 그것에 의하여 한국어 번역본을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호태왕비가 한글로 번역되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아마도 비문에 탈락된 글자가 많기 때문에 그것을 보충하지 않고는 그대로 번역하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정 인보 선생이 '용제 백낙준 박사 회갑 기념 국학 논총'에 '광개토 경 평안 호태왕 릉비 석략(釋略)'이라는 제목하에 비의 탈락된 글자와 간단한 어귀의 풀이가 있지만 비문 전체를 한글로 번역 해석한 연구서는 아직 없는 것으로 안다. 어쨋든 한국 고지도 전시 때에 광개토 호태왕비의 탁본이 전시된 것은 서울 대학 개교 이래 처음 있는 일이며 그것으로 인하여 고구려사에 대한 관심을 한층 높이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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