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제의 아들 주몽의 탄생과 고구려의 건국
보스톤코리아  2007-10-21, 00:38:37 
백린 (역사 학자)


-고구려의 건국-

      주몽의 고구려 창건은 그 시기로 볼 때 천명(天命), 말 그대로 하느님이 준 절호의 기회였다고 하겠다. 그가 두려워했던 것은 부여의 대소왕이 아니라 한나라와 그 요동전위이었던 현도군이었다. 그런데 그 한나라가 선제(BC.74~48) 이후로 허약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저간의 한나라 사정을 잠시 들어보기고 하자.
한나라는 원제(BC48~33)이후로 황제의 권위는 급격히 약화되어 정치상의 실권은 황제의 손에서 떠나 황실을 둘러싼 귀족, 특히 외척(황후의 친정 쪽)이 점유하여 황제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원제의 외척인 왕망이 영의정 격인 대사마에 임명되면서 정권은 그의 손에서 요리 된다. 왕망은 그것도 부족하여 자기 딸을 다음 황제인 평제(BC6~2)에게 주어 황후로 삼게 한다. 그리고 2년 후에 왕망은 평제를 시해하고 선제의 현손인 영을 받아드려 황태자로 책봉한다. 이 영 이 한왕조 마지막인 황태자 유자영 이다. 왕망은 계획된 각본 대로 서기 8년 한왕조의 유씨에 대신하여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신(新)이라고 했다. 역사는 왕망 이전의 왕조를 전한 또는 서한 이라고 한다. 그와 동시에 종래로 한나라의 요동 전위였던 현도군도 그 세력이 약화되어 고구려의 발전에 장애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같은 중국의 혼란한 시기에 주몽은 한나라의 원제건소 21년(BC37년) 비류곡 홀본(忽本)에서 고구려를 건국 하였다. 비류곡의 홀본에 정도한 주몽은 먼저 북쪽의 말갈을 공략하고, 비류수 상류에 있는 비류국을 정벌하였으며, 태백산 남쪽의 행인국을 멸하고, 동쪽에 있는 북옥조를 정복하여 건국의 기반을 다져갔다. 주몽은 비루국왕 송양을 찾아갔을 때 말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홀승골에 내려와 도읍하였다" 고 하면서 고구려에 예속할 것을 요구했다. 동명왕 주몽은 비류국을 정복할 때 송양 왕과 변론으로 다투고, 활쏘기로 재주를 경쟁하면서 송양 왕을 굴복 시켰다고 한다. 나는 이 제목을 읽고 역사적인 사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옛말을 듣든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나라를 내주고 정권을 파는 일이 그렇게 간단히 해결될 수 없는 일이다. 천하통일의 대업을 성취 하려면 각지에 할거하는 군왕들을 하나하나 정벌 하여 예속 시키는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 건국 당시 고구려는 10만 대군은 모르지만 적어도 5만 군사는 확보하고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의 전성기에는 30만 대군이 건재하였다고 하니 말이다. 그리고 행인국을 정벌 할 때는 오이 와 부분노 에게 2만 군사를 주어 공략하게 하였다. 함경북도 동명왕 그 10년(서기 27년)에는 부위염 장군을 북옥조(연해주와 함경북도에 위치하였음)에 파견하여 북옥저를 공략, 그 지방을 고구려의 성읍으로 정했다.
국가발전이 온전 하려면 무엇보다도 백성이 따라야 한다. 주몽은 항복 받은 송양을 그가 통치하던 지역을 다물부로 정하고 그 도주에 봉했다. 그리고 송양의 딸을 주몽의 장자인 유리왕의 왕비로 맞아 들인다. 이로 하여 주몽이 영특하고 도량이 넓었음을 알 수 있다. 항간에 알려지기를 주몽은 천제의 아들이며, 무예가 출중할 뿐만 아니라, 현명하며 인자하고 덕망이 높아 백성을 지극히 위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여러 곳으로부터 많은 백성들이 몰려 들었다.
한편 부여의 대소는 라이벌이던 주몽이 남쪽으로 멀리 도망가 버렸기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자 책봉 문제도 자기 뜻대로 일단락 되었기 때문에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런데 금와왕은 세자 책봉 문제와 왕자들의 성화로 심경이 많이 상하였고 또한 노쇠해져서, 정권을 태자 대소에게 물려주고 후비 유화를 데리고 동부여로 옮겨 갔다. 주몽이 남쪽으로 내려가 나라를 세운 후로도 대소는 여전히 주몽을 위협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그 공격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라의 기틀을 확고히 한 주몽은 이제 대소의 부여쯤은 크게 두려워할 상대가 아니었다. 다만 금와왕과 어머니 유화를 생각하여 부여를 공격하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런데 동명왕 14년(서기 24년)에 주몽의 생모인 유화가 동부여에서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았다. 동부여의 금와왕은 유화를 태후(太后)의 예로 장사를 모셨다. 금와왕은 후비인 유화를 끔직히 사랑했던 것 같다. 유화의 신령을 모시기 위한 신묘(神廟)까지 세웠다고 하니 말이다. 주몽은 동명왕의 극진한 배려에 감사하고자 사신을 동부여에 보내 방물을 올리고 그 성덕에 보답 하였다. 「삼국유사」는 "동부여의 금와왕이 돌아가시자 태자 대소에게 왕위가 전해졌다" 고 하였다. 금와왕이 언제 돌아가셨는지 전하는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 가 없다.  
생각 하건데 후비인 유화가 세상을 떠난 후 얼마 아니하여 서거한 것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금와왕이 돌아가시자 대소가 동부여의 왕위에 오른 것이다. 그 후 동부여에 대한 말이 일체 없는 것을 보면 동부여는 대소왕의 부여에 통합된 것 같다. 부여 민족의 본래의 근거지가 지금의 길림성 장춘(일제시의 신경)과 농안 지방이 었다 는 데는 별로 이의가 없는 것 같다.

<2주 후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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