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흥망과 발해국의 태조 대조영 9
보스톤코리아  2008-09-02, 22:30:24 
백린(역사학자)


- 당제국과 고구려의 관계 -
역사가들은 악명 높은 수나라의 양제를 진나라의 시황제에 비교하려고 한다. 역사상 가장 악독한 진나라의 시황제는 분서항유 등의 간악한 폭정을 자행했지만 중국을 통일하고 정치제도를 확립하였으며 북방 오랑케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역사상 유래가 없는 거대한 만리장성을 쌓았다. 수나라의 양제는 고구려 원정에 실패하고 국고를 탕진하였지만 황하와 양자강을 연결하는 대운하를 건설하였다는 것에 그 공통점을 찾고 있다.

중국의 시세는 대체적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기울어진 경사지대이다. 그리고 양자강 이남은 오랜 후에 개발되었지만 그 옛날에는 호수와 습지대의 원시림과 정글을 이루고 있는 황무지여서 일찍부터 그 개발이 요구되어왔던 것이다. 아시다시피 중국의 상고시대에 있어서 하(夏) 나라의 우왕의 치산치수(治山治水)는 너무나 유명한 얘기이다. 따라서 치산치수의 개념은 동양사에 있어서 제왕정치의 기본 조건이 되어왔다.

대체로 중국의 큰 강인 황하, 위수, 회수, 양자강 등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고 있다. 이들 4대 강을 연결하여 서남쪽에서 생산되는 양곡과 물자를 북쪽의 중원으로 수송하는 운하의 개통은 일찍부터 요구되어왔던 것이다. 수양제는 그것에 착안하여 국민의 반항을 잠재우고 경제 발전을 성공시키고자 서기 608년부터 시작하여 통제거, 강남하(江南河) 영제거, 천구 등 4대 운하를 개통시켰다. 이들 운하의 개통으로 낙양에서 항주까지 배를 타고 여행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황하를 통하여 삼동과 북경까지 물자를 수송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 운하는 그 후 몇 번인가 개수되었지만 지금도 옛 운하의 물길이 남아 있어서 교통과 물자의 수송에 편리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관광자원으로도 크게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공약으로 운하의 건설을 들고 나왔기 때문에 그 예로서 수양제의 대운하 건설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운하의 건설은 수해를 방지하고 물자의 유통을 원활히 하기 위한 것으로, 그것은 나아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으로 수양제의 대운하 건설은 그 의의가 매운 큰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1869년에 건설된 스위스 운하는 동서양을 연결 짓는 관문이 되었고, 1914년에 개통된 미대륙의 파나마 운하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관통하여 미국의 동양 진출의 큰 몫을 하였으며, 1816년에 개통된 미국의 에리(Erie) 운하는 뉴욕의 허드슨강과 5대호를 연결하여 미국 경제의 동맥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터이다.

수양제는 희대의 폭군이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에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인 화북과 곡창 지대인 강남을 연결하여 문화의 교류와 물자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였다. 유통은 경제의 기본 개념이다.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에 수백만의 인원을 동원하여 4대 강을 연결하는 대운하를 건설하였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말을 하다 보니 얘기가 딴대로 흐른 것 같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수나라가 망한 후에 들어선 당제국과 고구려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하자. 수나라 양제의 고구려 원정의 실패는 정치 문란을 자초하여 중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 시기에 북쪽 오랑캐인 돌궐이 다시 침공한다.

수양제는 돌궐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서기 616년 당국공(唐國公) 이연을 산동성의 태원(太原) 유수에 임명했다. 태원은 흉노와 돌궐이 자주 침입하는 길목이었다. 그런데 수양제의 폭정에 시달린 민중이 반기를 들고 일어나 그 반란의 무리 중에는 돌궐과 내통하는 자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원도 안전할 수가 없었다.

수나라 국운이 다한 이 때에 이연의 둘째 아들 이세민(당 태종)이 아버지 이연에게 수양제를 반대하는 군사를 일으키라고 재촉하였다. 마치 이씨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였을 때 그 넷째 아들 이방원(조선의 태종)이 아버지 이성계에게 역성혁명을 위하여 거사하라고 하여, 아버지를 도와 왕업을 창건한 이방원과 같이 당 태종 이세민이 아버지 이연을 도와 당나라를 창건한 것은 이씨 조선의 건국과 그 경우가 비슷한 상황이라고 하겠다.

당나라의 고조 이연은 북중의 귀족 출신이다. 이연의 할아버지 이호(李虎)가 수나라의 전신인 북주(北周)의 당국공이었다. 이연이 7세 때 아버지가 죽자 조부의 칭호에 따라 당국공을 계승하였다. 수나라가 들어선 후로 그는 수문제에게 충성을 바쳐 왔다.

이연이 태원에서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진압하는 도중 서기 618년 수양제가 세상 돌아가는 형편도 모르는 채 국녀를 데리고 강도에 내려갔다가 우문화(宇文化)에게 살해되고 만다. 그리하여 이연은 수나라의 도성 장안으로 진격하여 수양제의 손자를 옹립 공제(恭帝)로 추대하였다가, 서기 618년 5월에 지방 호적들의 지지를 받아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국호를 당(唐)이라 하였다.

당나라가 건국한 바로 그 해 9월에 고구려의 제 26대 영양왕이 서거했다. 영양왕은 후사가 없어서 그 이복동생 건무(建武)가 왕위를 계승했다. 고구려 제 27대 영류왕(榮留王)이다. 영류왕은 성품이 온유하고 인자하여 백성들로부터의 신망이 높았다. 그리고 새로 건국한 당제국과도 그 관계가 원만했던 것이다. 당나라 고조는 건국 4년 후인 서기 622년에 국내 정세가 안정되자 고구려의 영류왕에게 서신을 보내 말하기를 “이제 천하가 편안해지고 세상이 잘 다스려지고 있으니 서로 친목을 펴 수호를 두터히 하고 피차 강력을 안보한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여 화친을 청해왔다. 그리고 이어서 말하기를 “수나라(수양제)가 잇달아 군사를 일으켜 많은 백성들을 잃게 되고 가족이 유리되어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 두 나라가 화친을 통하여 의리가 막힘이 없이 되었음으로 이곳 중국에 있는 고구려 사람들을 돌려 보내기로 이미 영을 내렸습니다. 그러니 그 곳에 있는 한나라 사람들도 찾아 보내주시어 함께 인서의 길을 넓혀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여 포로의 교환을 제의해 왔던 것이다. (삼국사기, 영류왕 참조)

이 같은 사실은 두 나라가 화친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영류왕은 당 고조의 제의에 따라 고구려의 국토 내에 있는 한나라 사람들을 모두 찾아 송환했더니 당 태종은 수만 명의 포로 송환을 받고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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