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흥망과 발해국의 태조 대조영 13.
보스톤코리아  2008-12-12, 15:05:57 
요동에 있어서의 최대의 공격 목표는 안시성이었다. 안시성은 지형이 험한 산성일뿐만 아니라 10만여명의 잘 훈련된 막강한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수비가 견고한 큰 성이었다. 당태종은 안시성 공격에 앞서 성이 약하고 군량미도 많지 않아 보이는 건안성을 먼저 공격하자고 했다. 그런데 영국공 이적은 진언하기를 "건안성을 먼저 공격하면 그 뒤에 있는 안시성의 고구려군이 반드시 우리의 식량 운반의 길을 차단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식량이 다하여 더 싸울 수 없고 돌아갈래야 돌아갈 수 없게 되어 큰 봉변을 당할 것입니다"라고 반대 의견을 말하자 당태종은 장군인 이적의 말에 따라 안시성을 먼저 공격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안시성이 만약 당나라군에게 함락되면 그 앞의 작은 성들은 대항할 것들이 못되므로 당나라 군사는 일로 압록강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고구려는 매우 위험한 처지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유명한 그 안시성의 위치가 도대체 어디냐는 것이다. 이조 정조 때의 검서관인 유득공은 그의 저 『발해고』에서 설명하기를 "안시성은 당나라 때의 안시현이며 고구려 때는 안시라고 하였는데 그 후는 철주(鐵洲)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철주가 지금의 만주 지방의 어느 지점이냐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그 확실한 위치를 제시해 주지 않았다. 신당서의 안시성 싸움에 대한 기록들을 종합하여 고찰하건데 그 안시성은 지금의 만주 심양의 남쪽에 있는 안산(鞍山) 부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하여 연개소문은 안시성을 지키기 위하여 북부욕살(성주의 관직명) 고연수(高延壽)와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에게 고구려군과 말갈 병사를 합한 15만의 장병을 인솔하고 가서 안시성을 돕게 하였다. 고연수와 고해진 장군을 맞이한 안시성의 나이 많고 경험이 풍부한 대로(對盧)라는 분이 고연수 장군에게 이르기를 "내가 듣건데 당나라의 태종 황제는 일찍이 중국에 큰 난리가 있을 때 일어난 군웅들을 모두 토벌하여 천하를 평정하였고 밖으로는 서북쪽의 오랑케들을 정벌하여 복속시킨 당대의 영웅이라고 한다. 그는 지금 전국의 명장과 날쎈 병사들을 친히 이끌고 와서 우리를 치려고 한다. 그러므로 그 선봉을 당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지금의 우리 계획으로는 군사를 주둔시켜놓고 싸우지 않고 여러날 보내면서 지구전을 하다가 날랜 군사들을 나누어 보내서 당나라의 군량미와 군수물자의 수송로를 차단하여 버리면 당나라군은 얼마 아니하여 식량이 떨어져 더 싸울래야 싸울 수도 없고 돌아가려고 해도 돌아갈 길이 막혀 돌아갈 수도 없게 된다. 이것이 곧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안시성의 대로는 고연수에게 육도삼략(六韜三略)의 전법을 말해준 것이다. 그러나 고연수 장군은 대로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자신의 뜻대로 안시성의 남쪽 40리 밖으로 군사를 끌고 나가 당나라의 황제가 이끄는 군사와 싸우려다가 오히려 당태종이 파견한 별동 기마대의 유인술에 말려들어 그 복병에게 대패하고 만다.
고연수와 고혜진 장군은 3만 6천명의 군사를 데리고 나아가 당태종에게 항복을 청했다. 고혜진 장군도 곧 체포되었으며 그를 따라 안시성 전투에 참가했던 말갈 군사 3천명을 함정을 파고 거기에 다 묻어 죽였다고 한다. 고연수가 대로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군사가 많음을 과시하며 전투에 임했다가 결국 참패를 당하고 만 것이다.
그런데 그 훌륭한 전법을 일러준 안시성의 나이가 많고 경험이 풍부한 대로라는 분은 과연 누구일까. 삼국사기는 그를 고정의(高正義)라고 했다. 그러나 어디에 근거했는지 그 전거를 밝혀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고정이라는 대로가 안시성의 성주였다는 말인가 그렇게 되면 얘기가 많이 달라진다. 그러나 대로라는 분이 안시성의 성주일 것이다. 그에 대하여는 뒤에서 다시 말하기로 하자.
당태종은 고연수와 고혜진의 군사를 공략한 다음에 안시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10만의 군사로 안시성을 포위한 다음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당차(撞車, 큰 돌을 날려 성곽과 누각을 때려 부수는 수레)와 포차(抛車, 주먹돌을 300보 밖으로 날려 성 내부를 공격하는 무기)로 집중 공격하고 또 활을 쏘아대고 창을 던지면서 하루에 4~5 차례씩이나 집중 공격해 왔다. 그러나 안시성의 성주는 성문을 굳게 닫고 대항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나라군의 공격은 허사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당태종은 강하왕 도정에게 명하여 안시성의 서남쪽에 토산(土山)을 쌓게 하였다. 그리고 과이도위 부복애로 하여금 토산 위에서 병사를 거느리고 안시성의 내부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런데 토산을 지키라고 한 부복애가 사시로이 진지를 이탈하였기 때문에 그 틈을 타 고구려군 100여 명이 파괴된 성으로부터 나와 토산을 점령하고 말았다. 만여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쌓아 올린 토산을 고구려군에게 빼앗기고 오히려 전세가 불리하게 되었다. 당태종은 심히 노하여 부복애를 잡아 참수하고 제장수에 총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당나라 군사는 3일간에 걸쳐 계속 집중 공격했으나 성문은 굳게 닫혀 있고 성주가 지략이 높아 결국 함락 시키지 못하고 말았다. 이제 군사들은 모두 지쳐 있었고 날씨는 점점 추워 오는데 식량마저 떨어져 더 이상 싸울 수가 없게 되었다. 이를 본 당태종은 전군에 퇴각을 명했다.
백 린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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