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흥망과 발해국의 태조 대조영 16
보스톤코리아  2009-03-03, 19:25:28 
당고종은 남생이 망명해 오자 그를 「요동대도독 겸 평안도 안무대사 현도군공)」(遼東 大都督 兼 平壤道 安撫大使 玄도郡公)에 임명하고 고구려 정벌의 향도(鄕導)로 삼았다. 고종은 설필하력(契必何力)을 요동도 안무대사로 삼고, 좌금위 대장군 방동선과 영주도독 고간을 행군총관으로 삼고, 좌금위 장군 설인귀와 좌감문 장군 이근행(李根行)을 종군케 했다. 그리고 영국공 이적(李勣)을 요동도 행군 총관으로 임명하여 제 장수들에게 이적의 지시와 명령에 따르도록 하였다. 이적은 서기 668년 2월 신성(지금의 심양)에 이르자 제 장수들을 집합시킨 후 "신성은 고구려 서쪽의 도성으로서 험난한 요새이다. 이 신성을 함락 시키지 못한다면 다른 성들도 공략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라고 하면서 총공격을 명했다. 서기 668년의 고구려와 당나라 전쟁 시 안시성에 관한 언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마 당나라 군이 난공불락의 험한 안시성을 피해 부여성을 공격 함락시킨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런데 문제는 부여성의 위치가 어디냐는 것이다.
삼국사기 번역본을 보면 본문에 없는데도, 「부여성 : 송화강 유역의 부여 고도」라고 주를 달아 놓았다. 그러나 유득공은 발해고에서 부여부는 거란으로 통하는 길에 있다고 했다. 또 일본인 우에다 다게시는 발해사에서 중국의 역사지도를 참작하여 말하기를 부여는 요수 상류 송말수의 지류인 부여천 아래에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렇다면 지금의 요녕성 부신(阜新) 근처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그보다 이적의 군사들이 요하 유역인 신성(심양) 근처에서 싸우고 있었는데, 송하강 유역이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한국의 고대사나 근세사를 연구함에 있어 일본이나 중국 학자가 해석해 놓은 것을 충실히 검토하지 않은 채 그대로 인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적의 군사는 신성의 성벽을 따라 서남쪽 산 아래에 진을 치고 공격하니 성 안에 있던 사람들이 성주를 결박하고 나와 항복했다는 것이다. 신성이 함락되자 그 밑에 있던 16성도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적은 방동선과 고감 두 장군에게 신성을 수비케 했다. 신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들은 고구려의 남건은 군사를 파견하여 습격했다. 설인귀 장군은 고감을 구하고자 나갔다가 금산 싸움에서 대패했다. 신당서에 이르기를 고구려 군이 승리의 기세로 북을 치며 진군하던 설인귀는 횅격으로 협공하여 크게 무찌르고 남소성(南蘇城), 목제성(木底城), 창암성(蒼岩城) 등을 빼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그것이 아니라 사실은 설인귀가 금산 싸움에서 크게 당하고 돌아올 때 남생이 군대를 인솔하고 나타나 설인귀 장군을 도와 고구려 군을 섬멸하니 남소성, 목제성, 창암성 등의 성주가 손을 들고 나와 남생에게 귀순했다고 하는 것이 믿을 만하다.

당나라의 이적 장군이 이끄는 군사는 서기 668년 6월에 부여성을 함락시켰다. 부여성과 신성(만주의 심양)의 전투는 가장 치열했던 것 같다. 부여성이 이적의 군사에게 떨어졌다는 보고를 받고 남생은 5만 명의 병력을 다시 부여성에 보냈다. 그러나 살하수(薩河水)의 전투에서 이적의 군사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적의 당나라 군사는 신성과 부여성을 함락시킨 다음 내려와 대행성(大行城)을 치고 압록책(鴨綠柵)에 다다른다. 고구려의 군사는 당나라의 군사가 압록강을 건너지 못하게 항전하였으나, 당나라의 30만 대군을 당하지 못하고 말았다. 당나라 군사는 이 승리의 기세로 200리를 진군하여 욕이성(辱夷城)을 점령하니 인근이 다른 작은 성들은 두려워서 싸우지 못하고 도망하거나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신당서 고구려 편 참조) 당나라 군사는 668년 9월에 평양성을 포위했다. 당나라 군사가 평양성을 포위하고 집중 공격하자, 보장왕은 승산이 없는 싸움으로 알고 남건의 동생 남산에게 장수 98명을 주어 백기를 들고 나아가 이적에게 항복을 청하니 이적은 예로써 남산의 항복을 받아드렸다. 그러나 남건은 오히려 성문을 굳게 닫고 항전하면서 싸움을 걸었다. 남건은 군사를 총괄하는 사령관의 권한을 부도(중) 신성(信誠)에게 맡겼다. 신성은 비밀리에 사람을 이적의 당나라 군에게 보내서 내응할 것을 약속하고 5일 후에 평양성의 성문을 열어 놓았다. 당나라 군사는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성내로 달려 들어가 누각을 불 태우고 사방에 불을 지르니 평양성 내의 고구려인들은 쥐구멍 찾기에 바빴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당서의 기록이다. (한문자의 식자가 곤란하여 원문을 싣지 못하고 필자가 번역한 것으로 대행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신당서와 구당서에는 신라 군이 당나라 군사를 도와 평양성을 함락시켰다는 기록이 일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당서는 평양성의 함락을 당나라 군사 혼자의 힘으로 승리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중국 역사 기술의 교만이며 과장이고 독선이며 중화주의 역사관에 따른 기술이다. 그래서 신당서와 구당서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 역사 연구는 특히 이런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제 삼국사기에 의거하여 당시의 상황을 들어 보기로 하자. 당나라의 고종은 낙양에 와서 머물고 있는 신라 문무대왕의 동생 김인문(金仁問)을 급히 귀국시켜 신라 군의 후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신라의 문무대왕은 20만 군사를 이끌고 북한산 행궁에 진주했다. 대왕은 행궁에 그대도 머물러 있고 김인문 등 제 장수가 평양으로 가 당나라의 이적 군사와 합세했다. 남건은 군사를 내 보내 한판 결전을 하려고 하자, 김인문의 신라 병마(兵馬)가 선봉이 되어 맹렬히 격파하니 평양성 안의 남건 군사들은 그 예봉이 꺾여 힘을 잃고 말았다. 이적은 이때라 하며 신라의 날쌘 기마병 500명을 선두에 세우고 성문으로 들어가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승리의 개가(凱歌)를 올렸다는 것이다. 신당서의 설명보다 훨씬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나당 연합군은 평양성을 포위한지 수 개월 만인 10월에야 성을 함락시켰다. 끝까지 싸워 보려던 남건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살하려다가 뜻을 이루지도 못하고 포로가 되었다. 보장왕과 왕자, 대신, 장군들도 다 끌려 나왔다. 김인문이 보장왕을 영국공 이적 앞에 꿇어 앉게 하고 그 죄를 책문하였다 하는데 삼국사기의 이 말은 좀 과장된 것 같다. 김인문은 오랫동안 당나라의 서울 낙양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어에 능통했다. 그래서 보장왕을 심문할 때 그 김인문이 통역을 맡았던 것 같다. 보장왕이 영국공 이적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자 답례하고 보장왕과 남산, 남생을 데리고 군사를 돌이켰다. 고구려 705년의 역사는 여기서 막을 내리게 된다.
다음이야기 : 발해 대조영

백린(역사학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의견목록    [의견수 : 0]
등록된 의견이 없습니다.
이메일
비밀번호
거짓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2009.03.16
김자은(브루클라인 하이스쿨) 사람들은 서슴없이 무의식적으로 거짓말을 하곤 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중에 일어나는 일은 새까맣게 잊은채 돌이킬 수 없는 일을..
고교생이 보는 세상 : 평형우주 2009.03.09
다수의 우주론 중 하나인 평형우주란 다른 선택을 한 자신이 관측범위를 넘어선 어딘가에서 살고있는 우주, 그리고 심지어는 자기자신까지 존재할 수 있다는 이론이자 가..
고구려의 흥망과 발해국의 태조 대조영 16 2009.03.03
평양성의 함락 II
좋은 이웃 되기 민유선 (노인회장) 2009.03.03
"좋은 이웃 되기"는 제 삶의 좌우명중에 하나 입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늘 손해를 보며 살아왔다고나 할까, 설혹 불쾌하거나 무안한 말을 들어..
뉴잉글랜드 한인회는 이름변경을 고려해야 [12] 2009.02.14
현재 상황에 맞지 않아 ‘매사추세츠 한인회’, 혹은 ‘보스턴 한인회’로 바꾸는 게 좋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