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제 후손들, 한(漢) 나라를 떠나다
보스톤코리아  2014-11-17, 12:11:04 
문무왕 비문. 경주 박물관에 소장
문무왕 비문. 경주 박물관에 소장
 왕망의 신(新) 나라가 멸망 당한 다음에 왕망과 인척 관계에 있었던 김일제 후손들에게 어떤 일이 생겼을까? 

한(漢) 나라를 재건한 후한(後漢) 광무제에게 왕망과 김일제 후손들은 반드시 처벌할 대상이었다. 

당시 김일제 후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광무제의 힘이 미치지 않는 먼곳으로 피신하는 것이었다. 당시 김일제 후손들의 도피행각이 대당 김씨 부인 묘명(大唐金氏夫人墓銘)에 잘 기록되어 있다. 

김씨 부인은 당나라 조정에 벼슬했던 신라 사람 김충의(金忠義)의 손녀이고 김공량(金公亮)의 딸이었다. 

일찌기 이구라는 당나라 사람과 결혼하여 장안에서 살다가 AD 864년 3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1954년 섬서성 서안 곽가탄에서 김씨 부인의 묘비가 발굴되었는데 비문에 왕망 이후의 김일제 후손들의 행각이 기록되어 있었다. 2009년 4월에 부산 외국어 대학 권덕영 교수가 비문의 내용을 공개하였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다. 

“태상 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 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금천(少昊金天)이라 하니, 이 분이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받게 된 세조(世祖)시다. 그후에 유파가 갈라지고 갈래가 나뉘어 번창하고 빛나서 온천하에 만연하니 이미 그 수효가 많고도 많도다. 

섬서성 서안 에서 발견된 김씨부인 묘명
섬서성 서안 에서 발견된 김씨부인 묘명
 먼조상 이름은 일제(日磾) 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서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그를 발탁해 시중(侍中)과 상시(常侍)에 임명하고 투정후(秺亭侯)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京兆郡)에 정착하게 되니, 이런 일은 사책에 기록되었다. 
견주어 그보다 더클 수 없는 일을 하면 몇 세대 후에 어진 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여기서 징험할 수 있다. 

한(漢) 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 되었다. 지금 다시 우리 집안은 요동에서 불이 타오르듯 번성하고 있다.”

위의 비문에서 몇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비문 내용에서 신라 김씨 부인의 조상 김일제의 후손들이 요동으로 피신했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그런데 신라 김씨인 자신의 조부 김충의 나 부친 김공량은 신라에서 살았으니 두 내용을 합치면 김일제 후손이 신라 김씨가 되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는 신라 김씨가 흉노의 왕자 투후 김일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문무왕 비문과도 부합되는 사항이다.

두 번째는 김씨의 뿌리가 소호금천으로부터 시작됐다는 것이다. 신라 김씨(경주 김씨) 문무왕 비문에 자신이 소호금천의 후손이라고 기록하였고, 가락 김씨(김해김씨) 김유신의 묘비에도 소호금천의 후손이라고 적혀 있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김유신 열전에서 신라 사람들이 소호금천의 후손이라 하는데 가락 김씨 김유신 비문에도 소호금천의 후손이라 하니 신라 김씨와 가야의 시조 김수로는 동성(同姓)이 된다고 기록하였다.

세번째는 김일제의 후손들이 요동 지방으로 도피한 이유가 김일제 왕망과 연루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무제(漢武帝)는 BC 86년에 흉노의 본거지 오르도스 지역의 금성현에서 5만 명의 흉노인들을 김일제의 영지인 투성(秺城 ; 지금의 산동성 하택시)으로 이주시켰는데 왕망 정권이 무너진 다음에는 이곳에 살던 모든 흉노인들이 보복을 피해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짐작컨대 요동지방에는 꽤 많은 김일제 후손들과 흉노인들이 모여 들었을 것이다. 
왕망은 평소에 고구려를 하구려라고 부르며 폄하하곤 하였다. 그래서 고구려와 왕망은 적국의 관계였기 때문에 요동 지방이 흉노인들에게는 편안히 지낼 장소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데로 갔을까? 일절 기록이 없다. 

적대국가 고구려를 피해 한반도 서해안의 뱃길로 한반도 남쪽 김해, 경주 지방과 규슈 쪽으로 이동했다고 추정할 뿐이다. 그 증거로는 왕망의 신(新) 나라 때 사용했던 ①화천(貨泉)과 오수전(五銖錢)이 만주 요령에서 시작해서 평양, 황해도, 나주, 김해패총, 성산패총, 규수에서 출토되고 있는데 학자들은 김일제 일가의 도피로가 화천, 오수전의 출토지와 일치한다고 추정하고 있다.

김일제 후손들이 한반도로 도피, 이주하면서 이땅에서는 커다란 역사적 사건이 줄을 잇게 된다. 

서기 23년에 왕망의 신(新) 나라가 망하고 꼭 19년만인 서기 42년에 한반도 남단에서 한반도 최초의 김씨이며, 가락 김씨의 시조인 김수로 왕이 금관 가야를 개국하였다. 

23년 후인 서기 65년에는 서라벌의 도읍지 금성(金城)의 시림에서 신라 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탄생하게 된다. 

화천
화천
 화천(貨泉)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세운 왕망은 한나라 왕씨 유씨(劉氏)를 아주 싫어했다. 그래서 그는 즉위하자마자 한무제(漢武帝)때부터 사용해 오던 오수전(五銖錢)을 대신해서 화천을 주조하여 통용시켰는데 백성들이 불평해서 화천과 오수전을 함께 사용하게 하였다. 

왕망이 망하고 동한(東漢:後漢)을 세운 광무제 유수는 왕망 때 만든 화천을 아주 좋아하였다. 그 이유는 화천의 천(泉)을 풀어서 쓰면 백수(白水)가 되는데 백수는 광무제의 출신지 지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무제 때도 화천과 오수전을 그대로 사용하게 됐는데 그대신 화천을 백수진인(白水眞人)으로 점잖게 고쳐 불렀다고 한다. 화천을 후한 때도 계속 사용했기 때문에 김일제 후손들이 도피행로에서 계속 화천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필자 주>
유럽의 학자들은 AD 375년에 시작해서 100여년 동안 유럽 전역을 휩쓴 훈족의 원류에 대한 연구를 지난 300여년 동안 해오고 있었다. 

근래에는 독일 국영TV ZDF에서 훈족의 원류가 아시아 동단에 위치한 신라, 가야라는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앞으로 수회에 걸쳐 훈족과 신라, 가야의 친연성을 게재할 계획이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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