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어문의 시작과 끝
보스톤코리아  2020-11-02, 12:22:30 
가야금관(국보138호)
가야금관(국보138호)
청동기 시대 때 우리나라는 남방으로부터 벼농사 법을 받아들였다. 벼농사와 함께 인도 드라비다 농경어 400여 단어가 우리말로 동화되었다. 쌀, 풀, 벼, 가래 등은 모두 인도에서 들어온 말이다. "가야" 역시 인도 말이라고 하면 모두 놀라겠지만, 인도와 페르시아에서 시작된 말이다. 인도의 아유티아 지역에는 가라(加羅)라는 말이 있다. 가뭄이 들어 강물이 줄어들면 물고기들이 낮은 웅덩이로 모여들어 주민들이 쉽게 물고기를 잡아 먹을 수 있었는데 이 웅덩이와 물고기를 가라라고 불렀다. 그들은 하늘이 내려준 "가라"로 인해 생명이 보호받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물고기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쌍어문을 그려놓고 물고기를 숭배하고 하늘로부터 계속 보호받기를 원하게 되었다. 인도에서 쌍어문 숭배는 아유티아 지역에서만 믿어지고 있다.

페르시아 신화에도 "가라"라는 말이 나온다. 바닥에 뿌리를 박고 자라는 "고케레나"라고 부르는 나무 열매는 인류에게 만병통치의 영약이었다. 인류를 파멸시키려는 악신이 이 나무의 뿌리를 파 버리려고 두꺼비를 파견했지만 실패하였다. 알고 보니 나무 뿌리를 지키고 있는 두 마리 물고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물고리 이름이 가라였다. 가라가 지성으로 고케레나 나무를 보호하여 나무가 잘 자라고 그 열매와 잎사귀를 먹고 인류가 멸망하지 않고 지금처럼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 역시 쌍어문을 만들어 물고기를 숭배하고 물고기로부터 보호받기를 원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어(神魚) 숭배사상은 BC 2700년에 아씨리아, 페르시아, 스키타이와 파키스탄 간다라, 아유티아, 방글라데시에 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아유티아에서 피난길에 오른 허황옥 왕후 일가가 거쳐 간 중국 운남성에도 쌍어문이 있고 허씨네가 정착한 사천성에도 쌍어문이 있다. 그들이 쫓겨 간 중국 무창에도 쌍어문이 있고 마지막으로 허황후가 정착한 김해에도 쌍어문이 있었다. 김수로왕 남릉 정문에도 있고 그 옆에 있는 안향각에도 쌍어문이 있다. 허왕후의 오빠 장유화상이 세운 김해 신어산 은하사에도 쌍어문이 있다. 대웅전 수미단에도 쌍어문이 선명하다.

쌍어문의 여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 야쓰시로(八代)시에 야쓰시로 신사가 있다. 일본 최초의 신사로 묘견(妙見)공주 히미코(卑彌呼)를 모시는 신사라 해서 묘견궁이라고도 부른다. 묘견공주는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도 소개가 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한 여자를 받들어 왕으로 모시니 이름은 비미호(卑彌呼 : 히미코)였다. 그녀는 귀신의 도를 섬김녀 능히 무리를 현혹케 하였다. 나이가 들어서도 지아비 없이 살았으며 남자 동생이 옆에서 국사를 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묘견공주 히미코를 모시는 야쓰시로 신사의 지붕 꼭대기에는 머리는 용의 형상인데 몸체는 물고기로 된 한쌍의 쌍어문이 있다. 또 정문 처마에는 머리는 뱀이지만 몸체는 거북 모양을 한 구시와란 기와가 있다. 쌍어문과 거북은 가야의 국가 문장(文章)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히미코가 가야국 김수로왕의 딸이라는 추론을 하고 있다.

경남 김해 김수로왕릉 정문에 그려진 쌍어문
경남 김해 김수로왕릉 정문에 그려진 쌍어문
 
우리나라 "김해 김씨 왕세계"의 신녀(神女) 기록의 연대가 히미코의 생존 연대와 거의 비슷하다는 것과 신녀가 남자동생과 함께 어디론가 건너갔다는 구절이 있다. 선견(仙見)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자가 신녀와 더불어 구름을 타고 떠나 버렸다. 금관가야 2대왕인 거등왕은 강가에 있는 돌섬바위에 올라가 선견왕자를 부르며 그리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바위를 초선(招仙)대라고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규슈의 묘견(妙見)공주와 가야의 선견(仙見) 왕자가 남매였다고 학자들은 추론하고 있는 것이다. 김수로왕과 허왕후는 10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이 있었다. 첫째 아들이 거등왕이고, 둘째와 셋째 아들은 어머니 성을 받아 허씨의 시조가 되었다. 7 왕자는 외삼촌 장유화상을 따라 방장산(지리산)에 들어가 성불(成佛)한 다음에 구름을 타고 떠났다고 한다. 한명 공주는 편년가락국기에 의하면 석탈해의 아들 석태자(昔太子)에게 시집을 갔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 한명의 왕자와 공주는? 선견왕자와 묘견공주?

재야 사학자 이종기씨는 묘견공주는 김수로왕의 둘째 딸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매년 11월2일부터 이틀간 야쓰시로 시에서는 묘견공주가 야쓰시로에 도착한 것을 재현하는 묘견제(妙見祭)를 지내고 있다. 그들은 커다란 구사(거북이, 뱀)를 어깨에 매고 행진한다. 일본에서 거북과 쌍어문이 있으면 모두 가야와 관련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묘견공주는 가야에서 출발하여 야쓰시로에 도착한 것이다. 야쓰시로 시를 흐르는 구마천(球磨川)가에 세워진 하동도래비(河童渡來碑)에는 "지금으로부터 일천수백년전 삼천여명의 하동(河童)들이 이곳에 와서 바위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축제를 베풀었다. 이 축제가 오늘날까지 오레오레 ... 라이타이다"라고 쓰여 있다. 오레 오레 데-라이타는 영남지방 사투리로 오래오래 되었다는 말이다. 하동은 일본어로 갓파라고 부르며 야쓰시로 사람들은 예로부터 가라파라고 불렀다. 원래는 가라배(加羅輩)로 "가야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하동도래비는 가야 사람들이 이곳에 온지 오래되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규슈 남쪽 미야자키현에는 쿠지후르다케(구지봉)와 바로 옆에 가라쿠니다케(韓國岳 : 한국악)라는 두개의 산이 있다. 쿠지후르다케는 구지봉이고 가라쿠니다케의 가라쿠니는 가라(加羅)의 일본어 발음이다. 바로 이 두산에서 일본의 건국신화 천손강림 신화가 시작된다. 일본에서 제일 오래된 역사서 고사기에는 일본 개국왕 신무 천왕의 증조부 니니기노미코토가 쿠지후루다케에 강림하여 제천의식을 올린 후 가라우니 다케로 올라가 한반도를 바라보며 "여기는 좋은 곳이다. 왜냐하면 카라쿠니(가야)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그가 쿠지후루다케(구지봉)에서 강림할 때 이불 비슷한 보자기에 싸여 내려왔다고 한다. 동경대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는 "김해 구지봉에서 시작되는 가야의 건국신화와 구지봉과 같은 이름을 가진 규슈 쿠지후루다케에서 벌어진 일본 건국신화가 일치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라를 글을 발표했다.

우리 한국인들이 분명히 밝히고 싶은 진실은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건국신화는 구지봉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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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한 칼럼니스트    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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