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화랑세기花郞世紀, 18세 풍월주風月主 춘추공春秋公(5)
보스톤코리아  2020-11-02, 12:25:47 
김유신이 김춘추와 결탁하기 위해 기획한 ‘문희와 김춘추의 결혼’ 이야기를 삼국유사와 화랑세기를 통하여 풀어 보고자 한다.

정월 오기일, 즉 대보름날, 김유신은 집 앞에 김춘추를 불러 축국을 하다가 고의로 그의 옷고름을 찢었다. 그리고 이 옷을 기워준다며 자신의 집으로 데려 가 조용한 곁방에 넣고는 큰여동생 보희를 불렀다. 그런데 보희는 이날 ‘무슨 일’ 이 있어서 김춘추에게 갈 수 없었다. 그러자 유신은 작은여동생 문희를 불렀다. 그리고 그날 역사는 이루어졌다(삼국을 통일하고314) , 세계에서 유일하게 수장되었다는 왕릉의 주인공인 문무왕 김법민이 잉태되었다고 가정할 수 있는 날이었으니 역사적이지 않을 수 없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옅은 화장과 날렵한 옷차림에 빛나는 어여쁨이 사람을 부시게 했다. 춘추가 보고 기뻐하여 혼인을 청하고 예를 올렸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즉 첫눈에 반해 청혼하고 곧 결혼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다른 사료들을 비교해보면 여기에는 엄청나게 많은 우여곡절의 이야기가 생략되어 있다. 여기서 눈여겨 볼 한 장면은 ‘날렵한 옷차림’ 이다. 날렵한 옷차림이란 아주 얇은 옷 한두겹을 입었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실내이기는 하지만 때는 연중 가장 추운 계절인 겨울, 정월 대보름 날이었다. 문희의 옷차림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짐작케한다.

김유신은 당시(625년경) 신라 조정의 앞날을 예견하고 있었다.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는 진평왕의 치세는 종말이 가까와지고 있었고,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는 분명 왕위 계승서열 상위에 끼여 있었다. 그래서 동생 보희를 김춘추와 혼인시켜 자신의 권력을 더 공고히 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날 하필 보희에게는 ‘무슨 일’ 이 있어서 김춘추에게 다가가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왕비의 자리마저 놓치고 말았다. 이 ‘무슨 일’ 이 삼국사기에는 “사고가 있어서 有故” 라고 기록되어 있고, 화랑세기에는 “병이나서 因病”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어찌 사소한 일로 귀공자에게 경솔히 다가갈 수 있겠습니까?”315)  하면서 오라비 유신의 뜻을 완강히 거부했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기록은 유교적 윤리관의 냄새를 물씬 풍긴다. 반면에 작은동생 문희는 오라비의 뜻을 거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김춘추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기에, 같은 집안에서 함께 살고 있는 자매들을 지배하는 윤리와 도덕관념이 너무나도 상이함을 보이고 있기에 삼국유사의 기록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삼국유사에는 보희가 거절의 말을 한후에 협주挾註, 즉 덧보탠 설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옛 책에는 병病으로 나오지 못했다고 했다” 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화랑세기의 기록을 말함이 아닐까? 물론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당시에는 화랑세기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모두 동일하게 김유신이 처음에는 보희를 김춘추의 짝으로 점찍었다는 면이 흥미롭고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이렇게 보면 기록은 조금 다르게 되어 있지만, 병이 난 것을 유고有故 라고도 표현할 수 있기에 그날 분명 보희에게는 ‘무슨 병’ 이 있었다. 그 병이 무었이었을까? 
먼저 고려사高麗史(김종서, 정인지 등 편찬) 에 등장하는 작제건作帝建의 탄생설화를 보면, “신라 송악의 보육 집에 와서 묵다가 찢어진 옷을 깁는데 언니는 코피가 나서 나오지 못하고 아우가 대신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황제는 진의辰義와 동침해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작제건이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의 탄생설화는 ‘보희와 문희’ 의 이야기, 즉 ‘매몽설화’ 를 완전히 표절한 것이다. 김유신은 보육으로, 김춘추는 당황제로, 보희와 문희 자매 역시 언니와 동생(진의)으로 장소와 시간적 배경 그리고 이름만 바꾸었다. 심지어 서형산西兄山은 오관산五冠山으로 나오고, 그 산에 올라 오줌을 누어 천하를 잠기게 한것과 동생이 언니의 꿈을 산 것까지 동일하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될 부분은 언니가 ‘코피’ 가 나서 나오질 못했다. 언니의 코피는 무엇을 은유했을까? 

314) 신라의 삼국통일은 문무왕 대에 모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신라는532년 금관가야를 멸망시켜 복속하였고, 최종적으로 562년에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리고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황산벌전투에서 대승하면서 사비성을 함락하였고 백제를 660년에 멸망하였다. 백제를 정복한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항전으로 겨우 막아냈지만, 연개소문이 죽은 후에는 그의 동생과 아들들을 중심으로 귀족간의 권력쟁탈전으로 국력이 급격히 쇠락되고 있었다.  이를 틈타 당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신라도 남쪽에서 공격하여 668년에 멸망시켰다. 그리고 당은 고구려 영토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8년 후인 676년에 신라는 당나라 군대를 대동강 북쪽으로 축출하였다. 고구려 영토의 북부지방인 만주일대로는 진출하지 못하여 완전한 통일은 달성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문무왕은 661년 6 월에서 681년7월1일까지 재위하였다.  

315) 삼국유사(권1, 기이2 태종춘추공) 의 기록에 보면, <유신이 아해阿海에게 옷고름을 달아드리도록 하니 아해가 말히기를 “어찌 사소한 일로 귀공자에게 경솔히 다가갈 수 있겠습니까?” 이에 아지阿之에게 시켰다. 춘추는 유신의 뜻을 알고는 마침내 문희와 사랑했다. 이후 자주 내왕했다.> 아해는 보희이고 아지는 문희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신라속의 사랑 사랑속의 신라(김덕원과 신라사학회, 경인문화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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