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고의 저자 유득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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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톤코리아  2021-07-26, 13:27:17 
유득공의 발해고
유득공의 발해고
유득공은 1748년에 몰락한 양반가의 서자 출신으로 태어났다. 당시 조선시대에서는 출신 성분 한가지만으로 그가 앞으로 격어야할 불우한 생애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20여세때 박지원, 이덕무와 함께 개성과 평양, 그리고 백제의 도읍지였던 공주를 다녀오게 되었는데, 그때의 유람이 토대가 되어 위만 조선부터 고려때까지의 역사를 주제로한 21 도회고시(都懷古詩)가 만들어졌다. 유득공 같은 사람은 항상 우리 역사를 마음에 담고 살았기 때문에 이런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유득공은 평소에 한백겸의 "동국지리지"에 영향을 받아 북방사에 관심이 많았고 발해가 망한 후에 발해와 고구려 고토를 회복하지 못했음을 한탄하였다.
유득공이 31세가 되었을때 정조대왕이 규장각을 창설하였는데 남인 가운데에서 채제공을 규장각 제학으로 발탁하고 재주있는 서자 출신들을 시험을 쳐서 선발하였는데 당시 실학파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가 뽑히게 되었다.
검서관은 일정한 녹봉은 없었지만 편찬이나 교정 등의 업무가 끝나면 왕으로부터 하사품을 받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관직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유득공은 사서삼경, 동방 인물고, 홍제전서 등 많은 책을 간행한 공을 인정받아 1799년에는 박제가와 함께 영구 규장각 검서관이 되었고 포천현감을 거쳐 가평군수, 양주군수 등을 지내게 되었다.
유득공은 사절단의 일원으로 두번에 걸쳐 북경을 다녀왔고 심양을 한번 다녀왔는데 이때의 경험으로 중국학자들과 만나 역사, 지리, 풍속에 대한 정보를 주고 받게 되었다.
그는 중국을 다녀 오면서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에서 일어난 고구려와 발해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게 되어 "발해고"를 집필하게 되는 동기를 제공하게 되었다.
유득공은 "발해고" 서문에서 그가 발해고 서문을 쓴 동기를 밝혔다. 고려가 발해사를 쓰지 않았으니 이것으로 고려의 국격이 떨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차지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우리가 이것을 남북국이라 부르는 것은 마땅히 남북의 역사가 있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무릇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으로 동, 서, 북을 개척하여 이보다 더 넓혔던 것이다. 고려는 남쪽의 신라만 계승한 것이 아니라 북쪽의 발해를 계승했는데, 고려가 마음먹고 발해사를 편찬하려고 했다면 고려로 투항한 발해인을 상대로 역사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 당나라 사람 장건장은 발해에 사신으로 잠시 왔다가고서도 발해국기 3권을 썼는데 정작 고려인은 왜 발해사를 쓰지 않았는지를 유득공은 지적하였다.
오늘날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발해 역사가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유득공은 신라와 발해는 "남북국 시대"라는 말로 우리 민족끼리의 두나라를 이미 수백년전에 사용해 오고 있는 것이다.
유득공이 "발해고"를 저술하기 이전에 발해사는 중국의 정사나 일부 문인들의 문집, 고려시대의 삼국사기, 제왕운기, 동국통감 등에 단편적으로 기술되었는데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대두하여 이익의 성호사설, 이종희의 동사(東史) 등에서 하나의 항목으로 저술되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유득공이 발해고를 저술한 이후에는 조선학계에서는 발해의 역사를 한국사의 범주에서 연구 분석하려는 풍토가 정약용, 한치윤에 의해 나타나게 된다.
우리의 민족주의 사학자인 단재 신채호는 그의 발해고는 1천년간 사학자들이 압록강 이북을 베어버린 결함을 보충하였다고 호평하였다.

장건장의 발해국기
장건장(806-866)은 당나라 관리로 "발해국기"를 쓴 사람이었다. 당나라 뇨룡절도사 밑에서 요동, 요서의 해나라와 거란의 업무를 맡아 처리하는 부사로 유주의 판사를 겸하고 있었다. 서기 833년에는 발해에 머물렀는데 834년 당나라로 귀국한 후에 자신이 보고 느낀 점을 책으로 써 내렸는데 이것이 바로 "발해국기"였다. 발해 견문록으로 발해의 풍속, 관품, 궁전 등에 대해 기록하고 있으나 지금은 현존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신당서, 송사, 예문락 등에 이책의 이름과 인용된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신당서 발해전에 이책을 근거로 발해 역대 군왕의 시호, 지리, 물산, 교통 등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아쉬운 점은 이책의 편찬 시기가 발해 11대 대이진왕 시절이라 10대 선왕까지의 시호만 확인되어 있고 그 이후의 왕은 시호조차 알 수가 없다. 1980년대 초반 중국 시안에서 장건장의 묘비를 발견했다.

정강(靖康)의 변과 송막기문(松漠紀聞)
북송의 마지막 황제 휘종과 그의 아들 흠종이 1126년에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사로잡혀 끌려간 사건을 "정강의 변"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북송이 멸망당하고 휘종의 아들 조구가 임안(현재의 항주)으로 가서 남송을 세우고 고종으로 즉위한다.
남송의 홍호(洪皓)가 금나라에 파견되어 휘종과 흠종 부자의 석방을 교섭하였는데 일이 틀어져 홍호는 금나라에서 15년간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가 15년간 보고 들은 것을 많이 기록하였는데 금나라 것은 물론이고 발해, 위구르, 거란 등의 흥미있는 기사가 수록되어 있었다. 홍호가 죽은 뒤에 그의 아들들이 자료를 정리해 미리 말했던 "송막기문"에 이를 소개하였다. 먼저 발해의 풍속만 소개한다.
당시 발해의 사회상은 부인들이 모두 사납고 투기가 심하였다. 다른 성씨와 서로 맺어 10 자매를 이루었는데, 번갈아 남편을 감시하여 측실(첩)을 두는 것과 다른 여자와 교유(연애)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만일 이런 일이 알려지면 반드시 독을 넣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도록 꾀한다. 한 남편이 범한 바가 있어 아내가 알지 못하더라도 9인이 모두 일어나 그를 꾸짖으면서 다투어 증오하는 것을 서로 자랑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거란, 여진의 여러나라에는 모두 여창(창녀)이 있고 낭인(일반인)들은 소부(첩), 시종(몸종)들을 가지고 있으나 오직 발해 사람들은 바람피는 일이 없었다.
일부 일처제가 확고한 까닭인지 발해의 무덤에는 부부 합장묘가 많다고 알려져 있다. 첩을 둘 수 없었던 발해의 남자들은 밖에 나가서도 딴짓을 할 수 없었다. 신라나 중국, 거란, 여진족에게 모두 존재했던 홍등가 창녀들이 발해에는 전혀 없었다. 발해가 계승했다는 고구려에서도 창녀의 일종인 유녀가 있었는데 발해에는 없었다고 한다.
발해에서는 절을 할때 남자는 무릎을 꿇고 하는데 여자는 무릎을 꿇지 않는다고 한다. 여자의 위세가 아주 강했다는 말이다. 발해 사람 3명이면 호랑이도 잡을 수 있을만큼 용감한 발해 사람이지만 부인에게만은 꼼짝도 못했다고 한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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