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을 위해 요석을 멀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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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톤코리아  2022-04-11, 11:31:40 
원효 스님이 고행 수도한 동두천 소요산 자재암
원효 스님이 고행 수도한 동두천 소요산 자재암
원효가 요석공주와 함께 신혼을 즐긴 것은 단지 사흘뿐이었다. 그는 서둘러 요석공주와 작별하고 자신의 고향인 지금의 경산 압량 반룡사로 거처를 정하였다. 요석공주는 반룡사에서 멀지 않은 삼성산 자락 민가에서 아이를 낳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신라 10현 중의 한명인 설총이었다. 아기 아빠가 되어 있어야 할 원효는 지금의 경기도 소요산 자재암에 머물면서 수행에 전념하고 있었다. 요석공주는 홀로 떠나버린 원효를 찾아 설총을 데리고 자재암을 찾았으나 원효를 만나지 못하였다. 공주는 산아래에 별궁을 짓고 아침 저녁으로 원효가 수도하고 있는 원효대를 향해 아들과 함께 예배를 올렸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원효대사의 행적에 의구심을 아니 가질 수 없다. 원효는 자신이 아들을 가지고 싶다는 말을 온 신라에 널리 알리고 공주까지 차지하게 되었는데 신혼 사흘만에 탈탈 털고 떠나겠다고 하니 경망스럽기 그지없다. 끝내는 본인이 원하던 아들까지 생겼는데도 공주를 외면하니 존경받는 스님으로 취할 도리가 아니었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스님은 두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쓸 때 "향전"이라는 신라 향토 설화를 인용하였다고 하는데 일연 스님 본인에게도 이들의 이야기가 기이하다면서 그 내용을 받아들이기 어럽다고 하였다. 두사람은 끝내 함께하지 못했다. 소요산 자재암은 서기 654년 원효가 창건한 암자이다. 요석공주와 인연이 있은 뒤 오로지 수행에 정진하려는 일념으로 자재암 자리에 초막을 짓고 수행에 전념하였다. 관음보살이 수행의 깊이를 알아보려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해 원효를 유혹했지만 이를 물리치게 된다. 다음날 원효는 관음보살의 진영을 접하고는 비로서 자재무애의 수행을 경험했다고하여 이곳을 자재암이라고 이름하게 되었다. 

무애자재란 말은 깨달음의 경지를 일컫는 말로 매사에 걸림이 없고 자유로운 것인데 결코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는 제멋대로의 언행은 결코 무애행이 아니고 부처님의 삶을 닮아가는 것이 가장 합당한 무애의 삶이라고 한다. 원효는 천한 사람들 속에서 함께 어울려 놀았다. 일찍이 저자거리에서 가무를 하고 노래를 불러 이를 무애라 하였다. 밭가는 늙은이도 이를 모방하여 유희로 삼았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트렸다. 일찍이 이것을 가지고 방방곡곡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돌아오니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게 되고 모두 나무(南無)를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칭하게 되었다. 이는 모두 원효의 법화로 생긴 것이었다. 여기에 의상대사와 관세음보살이 불법의 힘을 빌어 도와주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 완성되는 것이다. 아미타보살이 내세를 주관하고 관세음보살이 현세를 보살피니 이는 화엄종의 기본 사상을 충족시키게 되는 것이다.

원효가 머물고 있었던 소요산은 산세가 금강산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기암괴석과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다. 소요산 구석마다 원효, 요석의 이야기가 스며있고 설총의 이야기가 배어 있는 곳이다. 원효대사가 요석공주를 두고 이름지었다는 공주봉 산봉우리가 있고 소요산 최정상은 의상봉으로 불러 한평생 사제의 정을 두텁게 하고 있다. 자재암에는 원효샘이라는 샘이 있는데 세간에 원효의 덕행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소요산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 식수를 해결하기가 어려웠다. 소요산이 돌산이라 마땅한 샘터가 없어 걱정하던 중 하루는 원효대사가 선정에 들어 지맥을 관찰하다 바위사이로 깨끗한 물줄기가 솟는 것을 발견하고 바위틈을 뚫어 깨끗한 물을 흐르게 하였다.

그후에 신기하게도 이 물을 마신 사람들이 속병은 물론 각가지 위장병이 치료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원효가 만든 우물이라하여 원효정으로 불리게 되었다. 여러 곳에서 만병통치의 약물로 소문이 퍼져 음력 3월3일 삼짓날에는 물을 마시러 오는 행렬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데 반면에 상주하는 수행승려가 수행에 어긋나게 하면 물이 조금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소요산은 경기도 동두천에 있는 해발 536m의 산이다. 산세가 수려해서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아드는 곳으로 알려져 왔는데 그중에 고려 때의 시인이며 문장가인 백인 이규보가 있고, 금세기에는 화담 서경덕, 매월당 김시습, 조선 4대 서예가이며 "태산가"로 널리 알려진 봉래 양사언이 있다.
이들이 이곳을 자주 찾아 소요했다고 해서 소요산이라는 지명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경기도 소요산 자재암의 요석공주 별궁지
원효 대사가 고행 수도한 소요산 원효굴
원효 대사가 고행수도한 소요산은 시인 묵객들이 줄을 이어 찾아 들었다. 양사언 초서. 보물 제1624호
108 계단을 딛고 소요산 자재암을 오르면 번뇌가 사라진다

서당 화상비(誓幢 和上碑)와 송고승전
서당 화상비는 원효의 손자 설중업이 9세기초에 원효를 추모하기 위해 원효의 일생에 관여한 여러 사람들의 이름을 망라하고 있는기념비인데 기이한 일이지만 원효의 부인 요석공주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 참고로 원효의 세속이름은 설서당이었다.

송 고승전은 서기 988년에 중국 송나라 승려인 찬녕(918-1002)이 저술한 중국과 신라, 고려의 고승전기이다. 원효에 대한 기록이 잘 되어있지만 설총의 어머니가 공주였다는 기록이 전혀없고 또한 삼국사기 설총전에도 요석공주에 대한 기록이 젼혀 없다는 것이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은 원효의 부인이 평범한 일반인 보다는 공주라고 부르는 것이 원효와 같은 위대한 인물에게 더 어울린다는 생각에 이런 설화가 지어졌으며 일연 스님은 그런 설화를 자신의 책에 반영한 것 뿐이라고 추정했을 것이다.

당시 신라는 엄격한 골품제 사회로 성골과 진골이라는 왕족이 있었고 그 밑에 6두품, 5두품, 4두품으로 이어지는 귀족 사회가 있었다. 요석공주는 왕족 진골에 속해 있었고 원효 가문은 귀족 가문 중 제일 높은 6두품에 속해 있었는데 진골과 6두품이 서로 결혼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었다. 만약에 이들이 결혼하면 원효와 공주는 6두품으로 강등되어 지금까지 누려온 많은 혜택을 당대는 물론이고 자손대대에 이르도록 상실하게 된다. 가장 비근한 예를 들면 낭해 선사는 태종 무열왕의 후손으로 진골 귀족이었는데 강등되어 6두품 귀족이 되었다. 신라 사회에서 친족은 7대까지이고 8대에 이르면 진골에서 6두품으로 강등되게 된다. 원효의 후손인 설총과 설중업은 훌륭한 학자였지만 골품제의 폐단을 넘지 못하고 크게 등용되지 못하게 된다.

경남대 인문학과 최유진 교수는 원효가 태종무열왕의 딸과 결혼하는 것은 설화의 세계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지 실제 역사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못박았다.
또 다른 의견으로는 신라 왕실 여자들은 아래 골품과는 결혼하지 않았다(이종욱), 골품제에서는 같은 신분의 사람들끼리 결혼했다(이종욱), 육두품은 아예 진골과는 결혼상대에서 제외된 신분이었다(이기백).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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