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도래인이 일본 불교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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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톤코리아  2022-05-02, 11:37:16 
동대사 비로자나 대불
동대사 비로자나 대불
의상대사가 당나라 종남산 지상사에서 화엄종 2대 조사인 지엄 화상 문하에서 현수 법장과 함께 동문 수학하며 화엄의 깊은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의상대사는 신라 화엄종의 조사가 되었고 법장은 당나라 화엄종의 3대 조사가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말한바 있었다.
세월이 흘러 의상대사 문하에 심상이라는 신라 법사가 있었는데 당나라에 가서 법장 문하에서 화엄종을 공부하고 성취한 바가 대단하였다. 일본 성무 천황 년간에(724~749) 나라 다이안지(大安寺)의 주지 양변 스님이 화엄종을 일으키려고 원흥사의 엄지 법사를 찾아 강연을 청했으나 그는 자신의 깨달음이 심상대사만 못하다고 하여 심상을 천거하였다. 그러나 심상에게 3번에 걸쳐 강연을 청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이 소문이 대궐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성무 천황이 직접 심상을 부르게 되었다. 740년에 화엄경을 강설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름있는 스승과 학자들이 천황을 모시고 행차하여 설법을 들었는데 심상대사의 설법이 신의 경지에 이르렀고 자주빛 구름 한조각이 가스가 산(春日山)을 덮어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기이함과 탄복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천황이 크게 기뻐하여 비단 1,000필을 내렸으며 왕후 공경이 모두 보시하였다고 한다. 심상은 원효대사가 집필한 화엄경을 한해에 20권씩 강설하여 60권 화엄경을 3년만에 설법을 마쳤다. 이때 양변 스님은 동대사의 주지로 심상의 수제자가 되었으며 이후에 스승과 제자가 노력하여 일본에 화엄종의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나중에 심상이 일본 화엄종의 조사가 된 것은 물론이다.
서기 735~737년 성무 천황 년간에 북규슈 후쿠오카, 다자이후 지역에 천연두가 발생하였다. 737년에 교토 일본 정부 관리가 규슈에서 천연두에 감염된 채로 교토로 돌아오면서 전국에 천연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의 실권자였던 후지와라 4형제를 비롯한 많은 귀족들이 사망하게 되어 말 그대로 정권 공백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업친데 덥친격으로 성무 천황의 유일한 왕자 아사카 친왕이 각기병(744)으로 사망해 버렸다. 왕자의 죽음은 1,400년이 지나도록 그 원인을 알지 못했는데 명치유신 때 Vitamine B1 결핍증으로 오는 심장질환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흰쌀을 주식으로 하거나 지나치게 탄수화물 위주로 식사를 하는 사람에게 생기는 심장질환으로 현미를 먹게 되면 도움이 된다. 

에바라지의 행기 스님 동상

동양에서는 천연두와 같은 역병이 유행하게 되면 왕이 덕이 없어 하늘이 내린 징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성무 천황은 부처님의 은덕이 온천하에 두루 미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동대사 대불 금동상을 조성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속 일본기 대불 조성 칙령) 그는 이 거룩한 불사는 온 백성의 소중한 참여와 협력이 있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성무 천황은 백성들의 마음을 모으는 권진행(權眞行)의 적격자로 교키(行基) 스님(668~749)을 발탁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불릴 정도로 신망이 두터운 스님이었다. 그는 백제에서 귀화한 도래인(渡來人)으로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준 왕인 박사의 후손이었다.
아버지는 백제 사람 고시 사이치(高志寸智)였고 어머니는 한의사 집안의 하치타 씨였다. 15세때 출가하여 신라승 혜기 법사의 문하가 되었다. 18세에 아스카 사의 백제 도래인 도쇼(道昭) 문하에서 이타(­­利他)의 도리를 배웠다. 도쇼 스님은 백성들을 위해 우물을 파고 다리를 놓는 등의 사회봉사를 많이 하였는데 후일에 행기 스님은 자기 스승의 뜻을 받들어 같은 일을 하게 되었다. 도쇼 스님이 입적했을 때 행기 스님이 그의 유해를 화장했는데 이것이 일본 최초의 화장이었다고 한다. 행기 스님은 22세때 백제 스님 의연의 문하가 되었다가 성무 천황 때는 일본 전국의 불교를 관장하는 최초의 대승정이 되었다. 성무 천황 때 일본은 동대사라는 국본사를 건립하고 있었는데 워낙 큰 토목공사라 자재, 인력, 돈이 턱없이 부족하였다. 천황은 행기 스님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행기 스님이 전국의 신도들에게 시주할 것을 권유하여 금전을 시주한 사람이 37만 2천명, 재목을 시주한 사람이 5만 1천 600명, 기술인력 51만 4천명, 자원봉사 166망 5천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인구가 500만이었으니 어린 아이들을 제외하면 인구 2명당 1명이 동대사 건축에 참여한 셈이다.
행기 스님의 출생지 에바라지(가원사, 家原寺)는 오오사카 바로 남쪽에 있는 사카이 시에 있는데 세계에서 제일 큰 무덤으로 불리는 닌토쿠 천황릉으로 불리는 대산(大山)릉이 이곳에 있다. 인구가 80만 정도 되는 도시인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사용하던 조총의 90%를 이곳 사카이에서 만들었고 왜군의 선봉이었던 소서행장이 사카이의 상인이었다.
서기 749년에 성무 천황은 왕위를 딸 효겸 천황에게 양위하고 행기 대승정 앞에서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이월당 가는 돌계단
정창원의 사산조 페르시아 유리잔, 백제에서 온 것으로 추정
히라카타 시 왕인 박사 묘

백제 근구수왕 때(375~374) 일본왕에게 말 2필을 보내어 아직기(阿直伎)로 하여금 말을 돌보게 하였다. 아직기가 경전을 잘 읽었으므로 태자의 스승을 삼았다. 천황이 아직기에게 너보다 더 뛰어난 박사가 또 있느냐?하고 물으니 "왕인(王仁)이라는 분이 있는데 훌륭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왕인 박사가 일본으로 오게 되었다. (일본 서기 응신천황)
양변 스님은 4세기경에 아스카 지역을 지배하였던 백제 도래인 아직기의 후손으로 아베(阿部) 집안 사람이었다. 동대사 요록에 따르면 동대사의 전신인 금종사(金鐘寺)는 733년에 양변(良弁) 스님에 의해 세워진 절이었다.
서기 741년 성무 천황 때 일본 전국 각지역에 국가 안위를 위한 호국 사찰을 여러 곳에 세우게 되었는데 나라지역의 호국 사찰로 동대사가 지명되었고 양변 스님이 초대 주지가 되었다. 동시에 그는 모든 호국 사찰들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양변 스님과 동대사가 맺어지게 된 인연이 아주 기이하였다. 양변 스님이 간난아이였을 때 그의 어머니는 아이를 밭에 놔두고 뽕밭일을 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매 한마리가 날아와 어린 양변을 입에 물고 날아가 버렸다. 양변을 물고 날아간 매는 당시 최고의 승려 직책을 맡고 있었던 백제 의연 승정이 주석하던 동대사의 전신 금종사의 나뭇가지에 양변을 걸어놓고 날아가 버렸다.
이때부터 양변 스님은 의연 스님 문하 밑에서 수학해 큰 승려가 되었다. 현재 동대사 경내에 있는 이월당(二月堂) 자리가 양변 스님이 세웠던 금종사의 옛자리이다. 
마지막으로 어린 아들을 매에게 빼앗긴 어머니는 아들을 찾기 위해 30년을 하루같이 전국을 떠돌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동대사 주지 스님이 매가 물어온 아이라는 말을 듣고 찾아가 꿈에도 그리던 모자상봉을 하게 되는데 양변 스님이 효심을 다해 어머니를 봉양하게 된다. 양변 스님은 85세때 입적하였는데 "동대사 개산(東大寺 開山)"이라는 이름이 따라 붙는다. 양변 스님으로 인해 동대사가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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