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르고의 영어잡설 58 ] 자동차와 카드 사이
보스톤코리아  2019-04-29, 10:40:28 
“이번 발렌타인데이에 아내에게 뭘 해줄 거니?” “흠, 차를 사 줄 예정이야.” 오바마처럼 훤칠한 키에 미남인 에두아드는 정말 돈 많은 자상한 남편인가보군, 부럽기도 하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근처의 에티오피아 식당에 가서 아내와 함께 호젓하게 외식을 할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차에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어.” 에두아드가 덧붙였다. 아니, 차에 뭐라고 쓰다니?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뭘 잘못 알아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에두아드도 소통에 문제가 있었음을 알아챈 눈치였다. “Oh, no. I mean, I’m gonna buy her a card, not a car.” 차라 아니라 카드를 사준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왜 card를 car로 잘못 알아들었을까? 언어학적으로 말하자면 마지막 자음은 목으로 삼키기 때문에 우리 귀에 들리지 않는다. 예를 들면 card와 cart는 글씨를 보면 확연하게 다르지만 소리로 들을 때는 딱 부러지게 구분되지 않는다. 두 단어가 구분되는 것은 마지막 /d/와 /t/의 차이가 아니라 모음의 길이 때문이다. 역시 전문용어를 빌리자면, /d/와 같은 유성자음이 오면 선행하는 모음이 길게 발음되고, /t/와 같은 무성자음이 오면 선행하는 모음이 짧게 발음된다. 거듭 말하지만 card와 cart는 끝의 자음이 거의 들리지도 않고 구분되지도 않는다. 좀 길다 싶으면 card이고, 짧다 싶으면 cart인 것이다. 

이렇게 배워놓고 현장에서는 card를 car로 듣다니! 역시 대화는 맥락을 파악해야지 단어 하나하나를 알아들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교훈. 맞아 아무리 돈 많은 변호사라도 발렌타인데이에 아내에게 자동차를 사준다는 것은 좀 유별난 일이야. 미국사람들은 카드 쓰는 것을 좋아하니까 소박하게 카드를 쓰리라는 생각을 했어야 하는데. 

아무튼 그건 그렇고, 유성음과 무성음 이야기를 더 해보자. 이들은 단어 끝에서는 서로 구별이 되지 않고 앞에 오는 모음의 길이에 영향을 줄 뿐이다. 물론 사전에는 발음기호를 다르게 하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실제 발음이 아니라 마음속의 발음을 표기한 것에 불과하다. 전형적인 예가 bad와 bat이다. 사전에는 각각 /bæd/와 /bæt/로 구분되어있지만, 실제 소리를 들어보면 전자가 후자보다 좀 길다는 점 외에는 전혀 다른 차이가 없다. 컴퓨터 음성분석을 보면 모든 유성음은 유성음으로 시작해서 무성음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bad와 bat를 길이에 의해 구분하게 될 상황이 있을까? 그런 상황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bad는 형용사이고, bat는 명사니까 서로 쓰이는 맥락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필자처럼 card와 car를 헷갈리는 것도 흔한 경우는 아니다. 둘이 다 명사이긴 하지만, 워낙 두 단어의 차이가 크니까.

전에 애리조나에 살 때의 일이다. 쌀쌀한 어느 가을날 저녁에 아이와 함께 쓰시 레스토랑에 갔다. 여종업원이 뭐라고 하는데 필자의 귀에는 “같이 드시겠어요?” 하는 것 같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눈치는 느리고 상상력은 풍부한 필자는 또 속으로 생각했다. 아, 인심 한 번 박하네, 아이랑 함께 왔다고 같이 드시라니? 여종업원은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는 필자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묵묵히 차를 따르고 있었다. 내 앞에 한 잔, 그리고 아이 앞에 한 잔. 따끈한 홍차였다. 같이 드시라는 말이 아니라 hot tea 드시라는 말이었다. 필자는 왜 hot tea를 ‘같이’로 알아들었을까?

언어학적 변명을 하자면 이렇다. /h/와 /k/는 둘 다 목젖부분에서 발음되는 소위 구개음이다. 연구개를 완전히 폐쇄했다가 열면서 발음하면 /k/가 되고, 반대로 그걸 완전히 개방하여 발음하면 /h/가 된다. 소주를 한 잔 들이켜고 [캬~] 하는 사람이 있고 [햐~] 하는 사람이 있다. 여러 언어에서 /k/와 /h/는 자주 교체된다. 미국사람들은 테무친을 [징기스칸]이라 부르지만 몽골인들은 그를 [징기스한]이라 부르고, 중국인들은 [청지쓰한(成吉思汗)]이라 부른다. 우즈베키스탄의 도시 부하라를 미국인들은 Bukhara라 쓰고 [부카라]라 발음하지만 현지인들은 [부하라]라 부른다. 뿐만이 아니다. ‘학생(學生)’을 일본식 한자음으로는 [각세]라 하고 ‘한국(韓國)’을 일본식 한자음으로는 [캉고쿠]라 한다. ‘중국음’이란 뜻의 ‘한음(漢音)’을 일본식 한자음으로는 [칸온]이라 발음한다. 이 정도면 필자가 hot tea를 [같이]로 알아들은 것이 오로지 필자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변명이 되지 않았을까.


올댓보스톤 교육컨설턴트, orugo4u@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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